길을 가다 문득 멈추어 섰다.

제법 이른 아침인데 커피 향이 진하게 스민다. 따뜻한 등이 켜진 커피숍을 지나치려다 뒷걸음쳐 간판을 보았다. 조심스레 유리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 음악이 경쾌하다. 새벽 7시부터 문을 연다는 젊은 사장과 몇 마디 나누다가 길을 마주하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냥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이런 횡재도 있구나.

직원들과 회식을 하고 차를 사무실에 두고 귀가했다. 적당하게 술을 마시면 아침에 더 개운하게 잠이 깨는 덕분에 두어 시간 여유가 있어서 걸어서 출근하기로 마음먹었다. 날씨가 조금 쌀쌀하기는 하지만 낮은 부츠를 신고 숄을 걸치고 경쾌하게 집을 나섰다. 사십 분정도 소요되는 길을 예전에도 걸어본 터, 더러 낙엽도 밟아보리라 기대하며 천천히 길을 나섰다. 버스가 지나는 길로 노선을 택했다. 차를 타고 출근할 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지인이 보내준 카톡을 보고 즉시 길거리에 서서 답장했다. 길을 가다 멈추어 서서 두어 번 길거리 풍경을 중계했다. 통근버스를 타기 위해 나란히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무료한 시선을 내게 보낸다. 활짝 웃어 보였다. 아는 사람인가 싶어 내게 눈웃음 보내던 사람이 주춤한다. 장난치듯 웃어주면서 갸우뚱하던 그 사람 곁을 지났다. 뒤돌아보니 그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그는 아침 내내 고민할지도 모르겠다. 떠오를 리 없는 기억을 더듬으며.

커피잔을 부여잡고 뜨거운 커피를 조심스레 머금었다. 생과자 몇 개를 초콜릿으로 장식한 접시를 바라보다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 값에 덤으로 따라온 생과자가 호텔 레스토랑 디저트 이상으로 화려했다.

잘 웃는 사내아이의 손을 어떤 여자가 잡고 있다. 아이는 그 여자를 가운데 두고 빙빙 돈다. 가끔 유리창 속의 나도 쳐다보고 지나는 사람의 발길을 쫓기도 한다. 그 여자도 아이처럼 연신 웃어가며 손을 뿌리친 아이를 뒤에서 껴안는다. 버스가 도착하자 아이를 올려보내고 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 여자 앞에서 '인애학교' 버스가 다시 출발한다. 아이를 보낸 그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행복'이라는 단어가 오늘 하루도 그녀 곁에 머물기를 간절히 구해본다. 사거리 신호대기선을 출발한 자동차가 가속이 붙어 무리로 지나간다. 나도 매일 아침 저 길을 그렇게 지나쳤을 것이다. 저마다 종종걸음으로 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몸짓에설핏 바쁜 출근길이 떠올랐다. 커피를 마시고 계산을 하니 야채차를 한잔 더 내준다. 시간이 많지 않아 마실 수 없다고 사양하자 길먹거리 컵에 담아준다. 요즘 들어 커피숍이 많이 생기는데 청년 사장의 서비스가 이 시장의 경쟁을 말해 주는 것 같아 감사하게 받아 들고 나오면서도 가볍지만은 않았다.

다시 길을 나섰다. 바삭한 종이 감촉 너머로 걸을 때마다 찻물이 출렁인다. '아딸'이라는 간판이 무슨 뜻인지 의아해하며 스쳤던 기억이 있는데 '아버지가 튀김을 만들고 딸이 떡볶이를 만드는 집'이라는 작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이 나왔다. 장판 집 앞을 지나면서 안을 기웃거려 보았다. 요즘 사무실 벽지를 바꿀까 생각하고 있던 터라 잠시 서서 닫혀있는 상점 안을 들여다보니 다양한 문양들이 마음에 들어왔다. 눈에 띄는 벽지 몇 개를 마음에 두었다. 풍경에 말 걸어 보듯 길을 가며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문을 닫았던 주유소가 노란 페인트칠을 다시 하고 기름값을 간판에 내걸었다. 몫이 안 좋은 것일까? 지난 오 년간 출퇴근길에 이용했던 주유소 중 하나였는데 두어 번 이상 폐업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사무실 근처 마지막 주유소인데 진입하려다가 되돌아 나온 몇 번의 경험 뒤로는 아예 없으려니 하고 지나쳤다. '여전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 집이 늘 거기에 있다는 기억 때문에 일어나는 매출은 얼마나 될까? 새벽이면 어김없이 문을 열던 동네 부식 가게가 있어서 밥하다 말고도 슬리퍼 끌고 나가 콩나물이나 두부를 사서 밥상을 차리고는 했는데 어느 날 문이 꽉 닫혀 있어서 난감했던 경험이 몇 번 있었다. 그 후로는 저녁에 미리 시장에 나가서 장을 봐다가 냉장고에 채워 넣었고 그도 여의치 않아지자 대형 마트에 가서 일주일치 부식을 사다 쟁여 놓고 먹다 보니 슬그머니 동네 부식가게가 사라졌다. 때로 아쉽기는 했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일이었다.

손에 든 종이컵 온도가 적당해지자 빨대로 차를 들이켜 가며 느긋하게 걸었다. 롯데마트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큰길 건너 사무실 간판을 바라보았다. 파란색 바탕에 흰색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내 시선을 따라 몇 사람이 그쪽을 응시한다. 금방 신호가 바뀌었다. 사십 분 동안의 거리 여행이 끝났다.

다음날 차를 타고 다시 그 거리를 지나쳤다. 속을 알 수 없는 정물화처럼 그것들은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같은 길 다른 느낌이다.



/유인순 한국문인협회 천안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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