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KN의 TV 심야방송은 이른바 토크쇼(Talk Show)들이 줄을 잇는다. 그 중에서 자니카슨이 나오는 프로가 제일 인기가 있다고 한다. 카슨이 무대에 나오는 꼴이 가관이다. 손뼉을 치고 거드름을 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목에 잔뜩 힘을 주고는 마치 로마황제나 된 것처럼 양팔을 벌려 방청석을 향해 내 말을 들어 보라고 콧대를 높인다. 그러면 방청석에서는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고 카슨은 인기에 감사한다고 절을 한 다음 세상일들을 이리저리 뒤집기도 하고 꼬집기도 하면서 너스레를 떤다.

그러면 청중은 배꼽을 잡고 웃고 좋아한다. 분명 미국인들은 개그맨에게 홀딱 미치는 모양을 보인다. 우리도 그럴 줄 알았던지 심야에 자니윤 쇼라는 것을 했다. 미국의 토크쇼를 흉내 내어 한번 해보았지만 여기저기서 비난이 빗발쳤다. 카슨처럼 해보겠다는데 왜 인기는커녕 흉 거리만 잡혔을까? 여기는 미국이 아니다.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라는 것을 알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자니윤은 도중하차하고 말을 파는 짓을 못하게 되었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말의 너스레를 떨면 혀에 가시가 돋친다. 이러한 풍속은 아직 우리에게 살아있는 셈이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변하여 말은 개그의 입질로 씹히고 말의 값은 신용을 탕진하려고 한다. 말을 믿지 못하는 세상이 제일 무섭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은 태산보다 무겁고 바다보다 깊다. 세치 혀가 탈을 부리니 항상 말조심을 해라. 한 맺힌 아낙의 입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이처럼 입조심, 말조심 하라는 말들이 많다. 책임질 수 있는 것이면 말하고 그렇지 않은 것이면 침묵하라. 그래서 말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라고 한다.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서로 나눌 때 말은 적을수록 좋고 눈길은 깊을수록 서로 끌리고 미소는 부드러울수록 서로를 통하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말 대신에 눈길로 말을 하거나 미소로 속을 주고받는다. 애틋한 눈길이나 따뜻한 미소가 속마음을 전하는데 더 미더운 까닭이다. 수다스러운 말이란 껍질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화장대 위에 놓여있는 분통에 불과할 뿐이다. 연인들의 입은 무겁고 사기꾼들의 입은 가볍다. 말이 많으면 일들이 뒤틀리고 빈말이 많으면 서로 못 믿어 의심하고 싸우며 흉잡힐 짓을 서슴지 않는다. 웃기는 말은 사람을 실없게 만들어 방정스럽고 촐랑거리게 만든다. 말을 훔쳐서 사람을 혹하게 하는 입은 더럽고 말을 팔아서 사람을 웃기는 입은 너절하고 속을 숨기고 빈말로 아양을 떨어 슬쩍 넘기는 입은 독하다. 어진 사람은 말을 무서워한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는 까닭이다. 말이 곧 마음속이고 행동으로 여기는 어진 사람은 좀해서 입을 열지 않는다. 맑게 눈을 뜨고 밝게 귀를 트고 사람을 맞이하고 사물을 만난다. 그래서 어진 사람은 항상 과묵하고 모든 일에 꼼꼼한 것이 아니라 자상하다. 사람을 믿는 까닭이다. 신이나 하늘을 믿는 자가 아니라 사람을 무엇보다 먼저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말 잘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의심하고 말을 함부로 써서 설레발레를 치고 안개를 깔아 마음속을 흔들어놓고 수작을 부린다. 말하자면 말을 가지고 속이기도 하고 꼬이기도 하며 이용하면서 팔기도 한다.

어진 사람은 사람을 이용하지 않는다. 사람을 믿고 말을 믿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자는 그 어려움을 안다. 현대인들은 거의가 너도 나도 개그맨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먹으면서도 나불대고, 마시면서도 씨부리고 앉아서도 지껄이고 서서도 종알거린다. 수다를 떨고 수선을 피고 맞장구를 치면서 말재주를 부린다. 이런 말괄량이들은 믿을 것이 못된다. 그렇다고 입을 꼭 다물고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독(毒)이 되고 해(害)가 되는 말을 아끼라는 것이다. 생활에 활기를 주는 말은 유머인 것이다.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은 우리 모두를 신바람 나게 한다. 그래서 말괄량이는 버림을 받고 유머인은 대우를 받는다.

유머는 진실과 정(情)이 담겨있다. 그러나 토크쇼는 진실과 정이 없다. 그저 말 그대로 말장난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유머는 생기(生氣)를 준다. 몸과 마음을 편케 한다. 우리의 삶에 활력소가 되는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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