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는 벼슬에 오르거나 학문을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나를 다스릴 줄 알고 남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라야 선비가 된다. 그러므로 학문이나 무슨 관직으로써 선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세상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잘 헤아리면서 행동함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선비의 길을 걸을 수가 잇다. 선비는 어떤 사람인가?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산다. 그러나 부끄러워할 줄 아는 목숨은 사람밖에 없다. 사람만이 선악을 분별할 줄 알기 때문에 사람은 다른 짐승과는 다르다고 본 것이다. 사람에게는 헤아리는 마음이 있지만 다른 짐승에는 느끼는 것밖에 없다. 부끄러워함을 헤아리는 마음이다. 그리고 선(善)을 그리워하고 악(惡)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만약 악을 범하고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면 그는 뻔뻔한 인간이고 잔인하거나 무서운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은 올바름(義)을 모른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다. 올바름의 부정이 악(惡)이며 올바름의 부정은 곧 사랑함(仁)의 부정이다. 선비는 이러한 부정을 무서워하고 부끄러워한다. 선비라면 집안에서는 효자가 되어야 하고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효자라는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위대한 성군들은 모두 하나같이 효자 아닌 임금이 없었고 또 효를 근본으로 삼았다. 높은 자리만 탐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 오르면 세상을 얕보려고 덤빈다. 그러나 부모를 모실 줄 아는 효성은 모든 사람을 겸손하게 대하게 한다. 거만하고 오만한 사람은 선비가 아니라고 한다.

청운의 꿈을 품어라. 그리고 벼슬을 해서 집안을 빛내라. 이러한 말들이 조선조의 양반 세상에서는 인기를 끌었다. 지금은 원통하거나 억울하다면 출세를 하라고 말한다. 출세를 해서 원한을 갚고 출세를 해서 억울함을 벗어 보라는 말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출세를 바란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될 것인가? 권력의 살풀이를 할 가능성이 농후할 뿐이다. 그래서 선비가 되려는 사람은 남을 위하여 헌신할 각오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봉사하라는 것이다. 백성을 위하여 머슴이 되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관존민비란 생각이 깊다. 이러한 생각 속에는 선비란 없다. 뇌물을 써야 일이 이루어지고 말로 되는 일이란 없다고 백성들이 불평하면 그러한 관료체제 속에는 선비 정신이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벼슬을 빙자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고 배를 불리는 사람은 도둑일 뿐 선비가 아니다.

선비는 자기가 일한 만큼 보수를 만족하고 땀 흘린 만큼 보답을 바란다. 그 이상의 것을 바라면 부끄러워 견디지를 못하는 사람이 선비인 셈이다. 선비는 치자(治者)의 모범을 보여준다. 나를 다스릴 줄 알기 때문에 남을 다스릴 자격을 간직한 사람인 까닭이다. 그래서 선비는 토굴에서 홀로 도를 닦는 도인도 아니며 법당에서 깨우침을 정진하는 스님도 아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봉사하는 사람이라면 선비의 길을 실천한다고 보아도 된다. 선비는 일을 앞세우기 보다는 인간을 앞세운다. 인간을 위하여 일을 하는 것이지 일에다 인간을 매달지 않는다. 인간미가 없는 일꾼이란 기계일 뿐이다. 로봇이 아무리 일을 잘해도 그것은 기계일 뿐이다. 그러나 꼼꼼하고 빡빡하게 임무에만 충실하다고 선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하는 일로 백성이 기뻐하기를 바라고 땀을 흘리는 자가 곧 선비인 것이다.

행하지 않고 말로만 하는 사람도 선비는 아니다. 아는 것이면 실천하고 모르는 것이면 배워서 모든 사람을 편하게 하려고 일하는 사람이 선비인 셈이다. 군자(君者)가 선비가 되면 세상이 편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군자는 남을 사랑할 줄 알기 때문이다. 선비란 누구인가? 마음과 행동이 깨끗해서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선비가 치자(治者)가 되면 행복한 세상은 만들어 지는 것이다. 평등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삶이 되는 것이다. 이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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