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일의 역사기행>문화해설가 · 저술가 박성일

당 태종이 이끄는 60만 대병력의 당군이 고구려 원정에서 연개소문의 고구려군에 완전히 참패한 사실은 중국 문학작품에도 엄연히 등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독목관(獨木關)」&amp;amp;amp;amp;middot;「살사문(殺四門)」&amp;amp;amp;amp;middot;「어니하(於泥河)」&amp;amp;amp;amp;middot;「분하만(汾河灣)」등 4편으로 이루어진『막리지 비도대전(莫離支 飛刀大戰)』이란 경극(京劇)으로서, 대만에서는 지금도 당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달아나는 장면이 나오는 이 경극이 인기리에 상연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kbs-tv의 오락프로그램인『스펀지』에서「어니하(於泥河)」란 제목으로 소개된 적도 있다.

이 경극의 주요 내용은 '고구려에 쳐들어왔던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패해 달아나다가 진흙뻘인 어니하에 이르러 도망가는 속도가 늦어지면서 뒤따라온 연개소문에게 붙잡혔고, 연개소문이 당 태종에게 활을 겨누고서는 &amp;amp;amp;amp;quot;항복문서에 서명을 하라.&amp;amp;amp;amp;quot;고 위협하는 순간, 홀연히 나타난 당나라 장군 설인귀가 연개소문과의 싸움 끝에 연개소문을 패퇴시키고 당 태종을 구출해낸다'는 것이다.

이 경극에서 연개소문이 설인귀에 패하는 것으로 묘사돼 있지만, 이는 중국인들이 자기들의 자존심 손상을 보상받으려는 고육지책의 한 수단이었으며, 엄연히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붙잡혀 죽을 뻔한 내용은 생생히 살아 있다.

▲연개소문의 전투지휘도(민족기록화)-보장왕 21년(662)연개소문이 대동강 상류인 사수(蛇水)에서 방효태가 이끄는 당의 주력군을 섬멸한 전투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경극에 등장하는 연개소문은 5자루의 칼을 지닌 무시무시한 용맹을 지닌 장수로 묘사돼 있어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져 있는데, 역사평론가 이덕일 씨는 &amp;amp;amp;amp;quot;연개소문의 이런 모습이 고구려 전통무예인 칼을 날리는 '비도술(飛刀術)의 마지막 전습자였기 때문&amp;amp;amp;amp;quot;이라고 설명하였다.



중국 입장에서는 타도 대상이어야 할 적장 연개소문의 인물됨과 행적이 당(唐) 이후 송(宋)&amp;amp;amp;amp;middot;원(元)&amp;amp;amp;amp;middot;명(明)&amp;amp;amp;amp;middot;청(淸) 등 뭇 왕조를 거치면서 소설과 전기 뿐 아니라, 평화(平話)&amp;amp;amp;amp;middot;사화(史話)&amp;amp;amp;amp;middot;잡극(雜劇)&amp;amp;amp;amp;middot;연의(演義)&amp;amp;amp;amp;middot;지방희곡&amp;amp;amp;amp;middot;경극(京劇) 등 각양각색의 장르에 수용돼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한 마디로 누차에 걸친 고당전쟁(高唐戰爭)에서 당 태종을 패퇴시켰던 연개소문이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인물이자 중국인들의 영웅(英雄)이었음을 반증해주는 실례라 할 수 있겠다.



『신당서』에서 &amp;amp;amp;amp;quot;출병할 때는 병사 10만 명에 말이 1만 필이었는데, 돌아갈 때에는 전사자가 1천여 명이고 말은 열이면 여덟 마리가 죽었다. 수군 7만 명 가운데 전사자 또한 수백 명에 달했다. 전사자의 유골을 모아 유성에서 장사지내라 이르고, 성대한 상을 차려 제사를 지낼 때 황제가 임해 곡하니 따르던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amp;amp;amp;amp;quot;고 기록했듯이 많은 중국 사서들은 당나라가 충분히 이길 수 있었으나 고구려에 아량을 베풀어 철군한 것처럼 기록하였다. 하지만 또 다른 기록에서는 당 태종이 철군하면서 &amp;amp;amp;amp;quot;만일 위징(魏徵 : 580~643)이 살아 있었다면 나에게 이 원정이 있지 않게 하였을 것&amp;amp;amp;amp;quot;이라며 크게 후회했다고 하고, 또한 전사자의 위령제를 지낼 때 모든 신하들이 슬픔의 눈물을 흘린 것으로 보아 이런 기록들은 패전을 승전으로 둔갑시키려는 사서 편찬자들의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고구려 병력이 30만 정도였으며, 또 공격에 나서기 위해서는 병력의 규모가 최소한 수비군의 2배 내지 3배는 돼야 한다는 것이 병법의 기본임을 생각할 때, 고구려 원정에 동원된 군사가 고작 10만 명이었다는 중국 사서들의 기록부터가 엉터리 내용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아무튼 그 후에도 당의 공격은 계속되었으며, 특히 662년 소정방(蘇定方 : 592~667)&amp;amp;amp;amp;middot;방효태(龐孝泰 : ?~662) 등이 이끄는 당군이 평양성을 공격함으로써 대동강 지류인 사수(蛇水)에서 개소문과 맞붙었다가 방효태는 열세 명의 아들과 함께 개소문에게 몰살당했는데,『신당서』에서는 &amp;amp;amp;amp;quot;방효태가 영남의 군사로 사수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연개소문이 이를 공격하자 모든 군사가 빠져 죽었고 소정방은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amp;amp;amp;amp;quot;고 기록해 이 사실을 인정하기도 했다. 연개소문의 무예 실력과 관련해 전해오는 일창자삼장(一槍刺三將) 전설, 즉 '창 하나로 세 장수를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이 사수대첩(蛇水大捷)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지켜온 고구려였건만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로는 당군과 신라군의 협공 속에서 주 방어선이 수도인 평양성으로까지 밀리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개소문이 세상을 뜨자 맏아들 남생(男生 : 634~679)이 아버지의 직을 계승하고 남건(男建 : ?~?)&amp;amp;amp;amp;middot;남산(男山 : 639~701) 등이 권력을 나누어 맡았지만, 형제간의 분쟁으로 인해 남생은 당에 항복하고, 개소문의 동생 정토(淨土)는 신라로 투항하는 등 내분이 일어나 결국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 내용은 우리 역사책에서 전하고 있는 고구려 멸망의 순간에 대한 기록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당시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연개소문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 전혀 언급돼 있지 않다. 사실 위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연개소문의 죽음은 지금까지 끄떡없이 버티고 있던 고구려를 한 순간에 멸망으로 몰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대한 기록이 너무도 무미건조하고 간단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다.



한편, 포로로 잡혀 중국으로 압송된 보장왕은 막리지에 의해 압박을 당해 어쩔 수 없는 처지였다는 점이 참작되어 사면되었고, 고구려를 배반하고 당나라 편에 가담했던 남생은 그 공으로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에 임명되었으며, 당군에 항복의 깃발을 들었던 남산까지 사재소경(司宰少卿)에 임명된 반면, 평양성에 남아 끝까지 당군에 항거한 남건은 검주(黔州)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개소문의 사망 시점과 관련하여 우리 학계의 기본 입장은『만선연구사(滿鮮硏究史)』를 저술한 일본인 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의 학설을 따라 보장왕 24년(665)으로 보는 가운데,『구당서』기록을 따른『삼국사기』에는 보장왕 25년(666)으로,『구당서』와『자치통감』및 1923년 중국 뤄양(洛陽)의 북망산(北邙山)에서 발견된 연남생의 묘지석에는 665년으로 기록돼 있다.



그렇지만『일본서기』「664년 10월」대목에 &amp;amp;amp;amp;quot;고려의 대신 개금이 그 나라에서 죽었다[終於其國]. 아이들에게 유언하기를 '너희 형제는 서로 화목하기를 물고기와 물과 같이 하여 작위를 다투지 말라. 만약 그런다면 반드시 이웃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amp;amp;amp;amp;quot;라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만약 연개소문이 이 즈음에 죽었다면『삼국지(三國志)』에서 제갈량(諸葛亮 : 181~234)의 죽음이 숨겨졌듯 개소문 역시 너무나 위대한 인물이었기에 사후 몇 년간은 비밀에 부쳐졌던 것은 아닐까? 즉 '죽은 공명(公明)이 산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고 하여 생겨난 고사성어 '사공명주생중달(死孔明走生仲達)'처럼 말이다.



한편, 최근 북한의 발표에 따르면 양강도(兩江道) 김형직군(金亨稷郡) 중부 김형직읍에 동림산(東林山)이 있는데, 그 남쪽 기슭에는 개소문의 묘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 1923년 중국 하남성 낙양 북광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맏아들 남생의 묘지인 천남생묘지의 묘지석.
하지만 이영희와 강준식은 연개소문이 고구려에서 사망하지 않고 일본으로 망명해 제40대 천무왕에 등극했다는 이색적인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이영희는『만엽집(萬葉集)』을 우리말로 해석하는 작업을 20년 이상 계속하고 있는 재일거류작가(在日居留作家)로 그녀가 쓴『노래하는 역사 1&amp;amp;amp;amp;middot;2』와『달아 높이곰 돋아사』는 모두『만엽집』의 내용을 토대로 한&amp;amp;amp;amp;middot;일간의 역사를 규명하고 있는 귀한 책인데, 내용도 아주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만든다.

『만엽집』은 일본의 고대 가요 4,516수를 모아 놓은 일본의 가장 오래된 노래집으로 모두 20권으로 되어 있으며, 주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에 걸쳐 동북 아시아의 격동기에 읊어진 노래들인데, 노래를 지은 사람들은 왜왕을 비롯하여 왕족&amp;amp;amp;amp;middot;고관&amp;amp;amp;amp;middot;병사&amp;amp;amp;amp;middot;서민&amp;amp;amp;amp;middot;거지 등 신분도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편집자는 당시 반체제 관료였던 오오토모노야카모치(大伴家持)로서『일본서기(日本書紀)』의 왜곡을 고발하기 위해 엮었는데, 그는 천무왕의 자손들이 정권을 쥐고 있던 서슬 퍼런 8세기 중반에 이 책을 무사히 펴내기 위해 나름대로의 눈가림의 지혜를 발휘했으며, 일례로『일본서기』에서 보이는 '천무왕(天武王) = 웅략왕(雄略王)'의 등식이 역력함을 근거로 천무왕의 작품이 확실함에도 굳이 웅략왕의 작품인 양 소개하는 편법을 구사했다고 한다.



이 노래들은 우리 신라 향가(鄕歌)처럼 한자로 쓰여 있으나 한시는 아니며, 한자의 음독과 훈독에서 빚어지는 소리를 두루 활용하여 당시 노래를 표기한 것으로, 10세기에 일부 해독 작업이 시작됐으나 삼국시대 우리말로 읊어진 노래들을 당시의 일본말로 억지 해독함으로써 뜻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잘못된 번역이 양산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 노래집의 특징은 정치적인 노래가 많고 성행위를 가장한 정치 모의 작품도 그 수가 적지 않아 이른바 겹 뜻을 지닌 이중가(二重歌)로 평가받고 있는 특이한 노래집이다.



그럼 다음 시간에는 마지막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과연 그럴까 하여 긴가민가 싶기도 한 '천무천황' 등극설이라는 흥미진진한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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