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생각해 오던 것이 있다. 내년에는 내가 아버지 나이가 되니 내가 가진 아버지에 관한 모든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이다. 때로 공개 강의 시간에 아버지를 언급하기도 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얘기하면서도 내 마음은 가볍기만 했다. 산업카운슬링 기법을 배우기 위해 격주로 서울에 갔다. 토요일 온종일 수업을 하느라 지인들의 애경사에 빠지기도 하고 숙제가 많아 동동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론만 가지고 직업상담사과정 수업을 하는데 부족함을 느껴온 터라 상담이론의 실습을 경험하기 위해 누구보다 적극 참여했다. 어제 게슈탈트상담기법 시간에 씩씩하게 내담자를 자청하고 단상에 마련된 내담자 석에 앉았다. 모의 상담이 진행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올라오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어라,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도 빈 의자에 앉은 아버지를 부르자 그 단어가 내게 얼마나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지 알아차리게 됐다.

아버지의 실패가 나의 실패라고 믿었던 열여섯 살의 감정이 속절없이 드러났다. 종가의 맏이로 태어나 동생은 물론 사촌 동생들까지 거둬 가르치시고 노부모와 어린 칠 남매를 건사하며 1년에 12번도 넘는 봉제사를 책임지던 아버지, 걸인에게조차 소반에 받쳐 음식을 내주게 하시고 입고 있던 비싼 털옷도 벗어주시던 아버지, 누구보다 자녀교육에 열성이었던 아버지에게 가혹한 실패가 닥쳤다. 나는 진학의 꿈을 접었고, 집을 떠나고 싶어 도망치듯 결혼했다. 사업 실패 후유증으로 당뇨 합병증까지 와 급격히 쇠락해가는 아버지 소식을 들을 때에도 나는 울지 않았으며 내 시집살이의 이유가 가난한 아버지 때문이라고 믿었다.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는 마음 하나만으로 병든 아버지를 찾지 않고 앞만 보며 바득바득 기어올랐다.

그러나 이제야 만난 아버지는 어린 시절 내가 극복할 수 없는 힘과 권위로 상징되던 '원망스러운 아버지'가 아니었다. 고독한 분이었고, 혼자서 열한 명 대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삶의 무게에 지쳐있었고, 아무도 대신 할 수 없는 병마와 싸우다 청춘에 돌아가신 '불쌍한 아버지'이셨다. 아버지처럼 실패하지 않으려고 자는 시간조차 아끼며 젊은 날을 보내다 얼마 전 당뇨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어쩔 수 없는 당신 딸이라는 생각에 아버지가 그리웠다. 점점 쇠약해져 쉰아홉에 명줄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살점 없는 허벅지가 눈물에 묻어났다. 돌이켜보니 당신은 얼마나 허망한 세월을 사셨던가. 아버지와 영화 보고 자전거 하이킹을 함께 했던 유복한 소녀 시절에서 내 시계도 멈췄다. 얼마나 꿈결같이 짧은 순간이었는가. 금쪽같았던 딸년에게서조차 보다 사랑받지 못했던 우리 아버지. 나는 빈 의자에 앉은 초라한 아버지에게 고백했다. "아버지 사랑해요. 저를 낳아주셔서 감사해요." 그러고 나니 눈물이 멈췄다. 상담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오는데 창피하기 보다 후련하다는 느낌이 가득했다. 박수 소리가 아버지의 너털웃음처럼 들렸다.



/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이사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