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세상을 혼자만의 힘으로 치켜들어 보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나보다는 이웃과 주변을 보살필 수 있는 미덕(美德)이 있어야 하고 오늘보다는 내일을 생각하는 마음에 여유를 가져야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너무도 조급하고 참고 견딜 수 없는 마음에 여유가 동결(凍結)되어 사소한 일에도 목청이 높아지고 자신의 옳고 나쁜 행위에는 판단력이 흐려지는 독선적(獨善的)인 개인주의(個人主義)에 길들여져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고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가 서슴없이 쏟아지는 천박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가난하고 힘겨웠던 세월을 벗어나 분에 넘치는 풍족한 생활이 찾아오게 되고 보니 자신 있고 용기 있는 모습들이 과시와 거만으로 변해가는 아쉬움이 있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지난날의 우리 식탁에는 자연에서 일구어진 푸른 식물 나라가 자리를 차지하였지만 오늘날의 우리 식탁에는 이곳저곳에서 굴러온 국적 없는 기름덩어리가 우리의 식탁을 점유하고 이것들이 우리의 입에 차츰 길들여지고 있다. 채식은 대부분 알카리성 식품으로 피를 맑게 하고 온화한 성품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지만 기름덩어리인 육식은 성급한 체질을 만드는 산성 식품으로 오늘날의 인색해지는 민심(民心)이 이러한 음식 문화에서도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예(禮)와 질서(秩序)는 같은 그릇에 담겨진 음식과 같은 것으로 이것은 퍼내는 방법과 들어가는 구멍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이것을 지배하는 지주는 다름 아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심(良心)이라고 보면 된다. 예(禮)의 사전적인 의미는 원활한 인간관계를 위하여 일상생활의 규범(規範)과 일정한 형식을 자의에서 스스로 갖추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질서(秩序)는 사물 또는 사회가 올바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할 일정한 차례나 규칙을 말하는 것으로 모두는 자율적(自律的)인 방법에서 양심(良心)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요즘은 각기 휴대전화가 있어 편하지만 얼마 전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여러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면서 줄 서 있는데도 혼자 전화기를 붙잡고 상대방과 긴 시간 잡담을 늘어놓는 것도 공중질서를 이탈하는 행위이며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고 통화내용이 신경질 난다고 전화기를 집어 던지고 심지어는 유리벽을 발로 차 깨뜨리는 행위는 공공기물 파괴에 앞서 자신의 파괴된 양심에서 얼마나 무거운 벌을 받아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버스나 열차 안에서 남의 호주머니를 넘보는 소매치기나 가정집을 기웃거리는 좀도둑이야 개인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단순한 범죄행위에 지나지 않지만 공공기물은 4천5백만 국민이 낸 세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공공기물을 파괴하는 행위는 4천5백만의 호주머니를 낚아챈 대도(大盜)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물론 우발적인 행위에서 순간을 망각한 상태라고 볼 수는 있겠지만 모두가 이렇게 불순한 사회생활을 하게 된다면 이 사회는 쑥대밭으로 변해 거리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고 빗나간 양심(良心) 때문에 법(法)으로 양심을 다스려야 하는 어두운 사회가 될 것이다.

백번 천번 입으로 하는 예(禮)와 질서(秩序)보다는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질서의식이 소중한 것이며 사랑하는 자녀를 밖에 내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언제나 사람조심, 차 조심하고 건널목 살피고, 인도를 이용하라고 하는 것은 바로 공중질서와 예의범절을 잘 지켜야 한다는 걱정 어린 교육이지만 막상 자녀와 함께 나들이를 하는 부모들이 먼저 질서를 어기는 비행을 저지르면서 배우고 가르쳐야 할 자녀를 “괜찮아, 빨리 뛰어”하면서 차도를 가로지르는 어른들의 비뚤어진 양심(良心)이 불신(不信)과 이질적(異質的)인 사회를 조장하게 될 것이고 깨끗한 사회 밝은 내일은 노력과 투자가 없이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 생활의 기본인 예의범절과 질서가 비뚤어지기 시작하면 서로를 불신(不信)하는 사회가 되어 민심(民心)이 흉폭하게 되고 예의와 도덕이 사라지게 되어 사회혼란은 말할 것도 없고 서로가 서로를 경계해야 하는 살벌한세상이 될 것이다. 안에서는 가정적인 예의범절과 질서가 있어야 하고 밖으로는 사회생활을 하는 공동체(共同體) 아래서 공공지서를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생활양식을 언제나 양심(良心)과 연결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야 한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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