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벽 안에 하얀 침대가 놓여 있다. 조각같이 완벽한 외모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티끌 하나 없는 방을 가로질러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다. 소변이 변기에 닿는 순간 모니터에 그 남자의 상태가 표시된다. 그 데이터는 바로 식당에 전송되고 그 남자는 데이터에 전송된 건강 상태에 따라 만들어진 식사를 한다. 영화 아일랜드 첫 장면이다. 영화를 본지 꽤 오래 지났는데도 그 장면과 영화 내용이 생생히 기억된다. 배설물로 몸 안의 정보를 알아내고, 부족하거나 넘치는 부분을 조절한 식단을 만든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날마다 8만6400초의 시간을 부여받는다. 그 시간을 사용한 대가로 각자에게 결과물이 주어진다. 생소한 일을 능숙히 처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시간에는 개인차가 있게 마련이다. 그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내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미 하고 있는 일을 진행하면서 새로운 일에 대한 학습과 역할 수행으로 내 시간이 압박 받고 있었다. 회사 월간행사표에 예상치 못한 스케줄이 또 추가됐다. 특성화고등학교 취업박람회에 참석할 학생들의 면접 클리닉이었다. 천안, 예산, 당진까지 일주일 만에 다섯 학교를 오가다 보니 단 십 분의 여유도 없다. 더구나 종강이 다가오자 한 강의에 100여 명씩 하는 몇 개의 강의 성적 입력 부담으로 마음도 무거웠다. 몸에서 여러 신호가 들렸다. 약국에 가서 물어보니 엄지와 검지 사이 이상은 간 기능 문제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며 임시방편으로 연고를 사용하란다. 소변도 거품이 있거나 진한 색을 띠고 냄새도 고약하다. 눈 밑이 파르르 떨린다. 기면증 환자처럼 적절치 못한 장소에서도 잠이 쏟아졌다. 가끔 한 가지씩 보내주던 몸의 신호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새벽에 당진에 가서 면접 특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삽교천으로 빠졌다. 다음 스케줄까지 두 시간이 있다.

평소라면 회사에 들러 잠깐이라도 일을 보고 일정을 진행했을 것이다. 누운 소도 일으킨다는 낙지 생각이 났다. 빗방울 들이치는 창가에 앉아, 커피 마시듯 풍경을 음미하며 낙지를 먹었다. '소처럼 일한 당신, 낙지 먹고 일어서라.' 자꾸만 어떤 광고의 문장이 패러디돼 혼자 실실 웃었다. 1대29대 300의 하인리히 법칙은 노동재해가 발생하는 과정에 중상자 한 명이 나오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같은 원인으로 상해를 당할 뻔한 잠재적 상해자가 300명이라는 법칙을 연구한 것이다.

이쯤에서 내 몸에 29번 정도의 신호가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300번의 신호는 이미 받은 터고, 29번의 신호도 감지된 듯하다. 마지막 남은 단 한 번의 신호는 나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줄 것이다. 공식 일정을 제외하고 여유시간을 찾아봤다. 그리고 영화 아일랜드처럼 쾌적한 침상에 몸을 묻었다. 건강한 세포를 배양하듯, 오후 다섯 시부터 다음날까지 내처 잠만 잤다. 일상에 빼앗겼던 수면욕구가 온몸을 덮쳤다. 수면요법 후 소변을 보면서 내 몸의 안부를 살폈다.



/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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