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로 연일 찌는 듯한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이럴때면 심신이 나른해지고 지쳐가는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여가를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여가는 과연 우리 일상에서 근로활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언뜻 생각하기에 여가는 근로활동과 구별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산업화된 오늘날 여가는 근로활동의 또 다른 측면으로 파악돼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여가는 근로활동시간에서 결핍된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 소통 또는 화합)의 보충이라는 일면에서 근로활동과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해야 할 개념이라고 본다. 산업사회의 근로형태는 자동화된 기계가 인간의 육제적 근로활동 뿐 아니라 정신적인 근로 활동을 대신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 자신을 위해 기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기술 우위 현상'을 초래했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푸라스티에(J. Fourastie)는 근로활동시간 단축과 그로부터 파생될수 있는 여러 가지 교육·여가 시간 연장을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되새겨봐야 할 것은 과학기술의 왕성한 발전에 의해 연장되는 여가시간이 인간관계의 풍요함과 인간성 회복에 과연 전위 역할을 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의 근로활동은 그 대상이 기계로 대치됐기 때문에 근로활동을 통해 인식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가능성이 말살됐다는 것이 서글픈 사실이다. 아울러 사회 현실을 구성하는 인간들의 행위는 합리적 근로활동은 물론 실천적이며 규범적인 언어행위가 큰 몫을 담당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근로 개념에서 근로활동을 매개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이 거의 폐쇄돼가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그러하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정치학자인 하버마스(J. Habermas)는 마르크스 주의의 근로 개념을 근로와 상호작용이라는 개념으로 확대시켜 자본주의적 산업사회의 물질·상업적 현상에서 인간성 규현의 능력을 '커뮤니케이션 작용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 내지는 가능성'이라고 강조했다.

이것은 행위 주체자, 즉 너와 나 사이의 자아성찰능력,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과 더불어' 그 사이에서 '담론'이 요구되는 '성숙함'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사람들과 더불어 자신의 이해와 신념을 담론을 통해 항상 매진하고 비판할 수 있을 때, 소외된 현대의 근로활동은 기술만능주의 세계에서 위축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로활동의 범주이든 여가의 범주이든 현대사회의 인간성 상실은 과학화된 기술문명에서 비롯된 기형적 근로활동의 등장과 이에 맞물린 커뮤니케이션 파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무엇보다 여가시간 구성은 매스미디어에 의해 더욱 왜곡되고 있으며 이러한 왜곡된 언론의 구성은 인간의 자기성찰과 인간성 회복에 좋지 않은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드는 것 같다.



/박기태 건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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