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청안에 있는 한운사 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했다. '빨간 마후라', '남과 북' 등 수많은 드라마·영화·소설 등을 쓴 한국의 1세대 TV드라마 작가 한운사의 작품세계를 기리고 이 지방의 문화적 긍지와 정체성을 높이고자 그의 생가 터에 기념관이 건립됐다. 한운사 선생은 대중매체에 대한 남다른 인식을 바탕으로 20여 년 넘게 60여 편에 이르는 방송극을 집필하면서 한국 방송극의 초석을 다졌던 향토 작가다. 회고록 '구름의 역사'에 따르면 그는 해방 전까지 한국문학 작품은 물론, 그 어떤 극예술도 제대로 접하지 못했던 비운의 식민지 지식인이었다.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폭력적 현실의 참담함을 극복하기 위해 당대 새로운 대중매체로 부상하기 시작했던 라디오를 택해 1948년 '날아간 새'라는 방송소설로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1957년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한 라디오드라마 '이 생명 다하도록'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방송극작 활동을 시작했다. 한운사는 '남과 북'으로 상징되는 한국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소재로 삼았으며 '현해탄은 알고 있다'로 대표되는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그렸고 이승만 대통령의 몰락을 다룬 '잘 돼 갑니다' 처럼 정칟경제·사회적 현안을 소재로 했다. 선생은 다양한 대중매체를 종횡무진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의 작품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세계로 향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이었다. 그는 대중예술을 바라보는 순수예술의 편견과 맞서면서 오랜 세월 매체를 가리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하며 20세기 한국 대중예술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며 시대를 앞서간 작가였다.

투병 중에도 '막장드라마'를 걱정할 정도로 방송극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 세상에는 많이 쓴 작가도 있고 적게 쓴 작가도 있다. 하지만 보석 같은 작품을 남긴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불꽃처럼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창작의 열정을 불태우다 한 시대의 전설로 남은 향토작가를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며 오늘 그를 탄생시킨 괴산군 청안면에서 님을 만난다. "죽으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 명예도 돈도 사람들이 그것처럼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이 다 아무것도 아니다. 없어지는 것이다.

86년을 살아오면서 겨우 깨달은 철학이다. 살아있는 동안 멋지게 살아라"고 한 그의 말이 사뭇 마음에 와 닿는다. 일본 유학 시절인 1943년 12월 학도병으로 징집된 조선학생들이 입대 전날 모여 있던 부민관에서 고이소 총독에게 "우리가 학도병으로 전쟁에 나간뒤 조선 2500만 동포들의 장래를 보장해 줄 수 있느냐"고 따졌다 한다. 무모한 발언이었지만 모범생이라는 이유로 근신 처분을 받고 다행히 중벌의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한운사 기념관은 고향을 조망하며 주변을 둘러싼 산들과 하늘의 찬란한 풍광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기념관 내부는 '씨'·'길'·'땀'·'구름'을 주제로 구성돼 인상적이다. 모쪼록 한운사 기념관이 작가 개인은 물론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과 지역 주민들이 어우러져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는 문화관광명소가 되길 바람해 본다.



/정관영 공학박사·충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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