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이산' 정순왕후 열연으로 안방극장 지진

조선 후기 성군으로 꼽히는 영조와 정조의 뒤에 한 여인이 자리하고 있다. 15세 때 66세의 영조와 혼인한 이 여인은 몰락한 양반가 출신이다. 구중궁궐에서 '금치산자'가 되기 십상이었지만 그는 타고난 영민함으로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가 돼 영조와 정조는 물론, 순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정순왕후(1745~1805)다.

"생각해보면 15세 나이로 시집온 어린 중전을 궁궐에서 얼마나 무시했을까 싶어요. 더구나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잖아요. 하지만 정순왕후는 거기서 조금도 지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단 하루도 편하게 생활하지 못했을 겁니다."
mbc tv '이산'에서 정순왕후를 맡아 안방극장에 지진을 몰고 온 김여진(35)을 만났다. '이산'의 악역 3인방 중 최고의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는 그는 선과 악을 오가는 연기를 능수능란하게 펼치며 시청자들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상황에 따라 180도 변하며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하는 연기를 펼치고 있는 그는 "꿈에서도 정순왕후를 만나곤 한다. 어리고 똘망똘망한 얼굴의 왕후가 뭔가를 꽉 움켜쥐고 괴로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 여자가 평생 잠을 제대로 못 잤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위해 모처럼 왕후의 한복을 벗고 나풀거리는 원피스 차림으로 나선 그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복스러움이 묻어나는 얼굴과 가녀린 체구 어디에서도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정조마저 해하려는 정순왕후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인터뷰가 진행된 커피숍의 손님들은 한눈에 그를 알아보고 "정순왕후다~"라며 반색했다.

--요즘 정순왕후가 연일 화제다. 표변하는 연기가 어떤가.

▲악역을 처음 해보는데 참 재미있다. 더구나 선한 모습에서 악한 모습으로 표변하는 것은 연기하는 맛을 느끼게 한다. 정순왕후는 극중에서 계속 변화하는 얼굴을 보여주며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 여자의 지금 얼굴이 진심일까 아닐까'를 헛갈리게 만든다. 아주 변화무쌍한 캐릭터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재미가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약간 어려운 과제를 해냈을 때의 쾌감도 느껴진다.

--지금까지 착한 이미지만 보여줬던 것이 주효했다.

▲처음에 의상 맞추러 갔을 때 내가 아닌 견미리 선배님 보고 의상팀에서 '정순왕후시죠?'라고 물었다고 하더라. 사실 견미리 선배는 '대장금'에서만 악역을 했는데 그게 그렇게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이병훈 pd님이 날 캐스팅하시면서 '자연스럽게 연기할 줄 알고, 그동안 착한 연기만 해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정순왕후는 내 연기생활 12년 동안 최고로 매력적인 캐릭터다.

--지금까지 연기한 장면 중 베스트 3를 뽑자면.

▲영조가 내린 정조에 대한 대리청정의 교지를 빼돌린 후 눈물로 사죄하는 장면, 영조가 괴질로 앓아누웠을 때 그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쏟아내는 장면, 베일에 가렸던 노론의 배후세력이 정순왕후임이 드러나는 장면 등이 반응이 좋았던 것 같다. 특히 영조 손을 잡고 울 때는 너무 울어 눈에 붙였던 미용용 눈썹이 다 떨어질 정도였다. 영조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절박감 등 복잡한 심정이 어우러졌던 장면인데 정말 가슴이 아팠다.

--교지를 빼돌린 후 눈물로 사죄하는 장면도 큰 화제였다.
▲대본에는 담담하고 논리적인 어조로 변명을 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촬영장에서 이 pd님이 '감정에 호소하자'고 하시더라. 왕의 교지를 빼돌린 것은 목숨을 걸고 한 짓인데 어떤 논리가 먹히겠는냐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라와 조정을 위해 옳은 일을 했다고 믿고 정말 충심이었음을 눈물로 호소했다. 정순왕후가 '오늘 난 영조를 어떻게 속여야 하나'를 고민했을 때 결국은 (거짓이지만 거짓으로 생각하지 않는) '진심'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영조가 대리청정의 명을 거두지 않자 정순왕후의 표정이 싹 바뀐다. '확 깨서' 울다가 표정이 싹 얼어붙는데 그 모든 신을 ng 없이 한번에 갔다.

--정순왕후는 어떤 인물인가.

▲시집오자마자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며느리 혜경궁 홍씨의 종아리를 때린 인물이다. 당차고 권력지향적이었다. 정조 사후 순조의 수렴청정까지 했다. 하루하루가 칼날 위를 걷는 듯 긴박했을 것인데, 누굴 탓할 수도 없는 게 스스로 그런 상황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평생 잠을 제대로 못 잤을 것이라 생각하니 불쌍하기도 하다. 후사가 없었던 것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 아니었을까. 또 기본적으로 나보다 훨씬 훌륭한 배우였다.

--사극에 출연하며 천민부터 왕후까지 다 해봤다.

▲그러고보니 정말 그렇네. 영화 '취화선'에서는 천기(賤妓)를 맡았고, 드라마 '토지'에서는 농부의 아내, '대장금'에서는 의녀, '신돈'에서는 옹주를 연기했다.

--'대장금'에서 의로운 의녀를 연기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사실 굉장히 아쉬움이 많이 남는 연기였다. 지금 하면 훨씬 잘할 텐데 너무 아쉽다. 드라마에서는 처음 하는 사극이었던 데다 그 당시만 해도 남의 말에 귀를 안 기울이는 고집을 부릴 때라 촬영 중반까지도 이병훈 pd님과 충돌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의견이 조율되지 않아 캐릭터가 어중간하게 표현됐다.

--이번에는 이 pd와 호흡이 잘 맞나.

▲물론이다. 이제는 내가 감독님의 의견을 100% 받아들인다. '대장금'에서의 '원수'를 지금 갚는 것 같다(웃음). 한동안 연기가 재미없었다. 내가 봐도 늘 비슷한 모습만 보여주는 것 같았고 내 연기력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해 뉴욕으로 날아갔다. 초심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처럼 연기를 다시 배웠다. 영어로 연기를 하려니 얼마나 어려웠겠나(웃음). 돌아온 지금은 귀를 열고 연기한다. 남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내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pd님도 말을 아주 잘 들으니 무척 흡족해하신다(웃음). 요즘 연기하는 게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지 모르겠다.

--정순왕후와 연기자 김여진의 공통점이 있다면.

▲고집이 비슷하다? 연기를 즐긴다?(웃음) 그래서 친근하다.


1995년 연극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로 연기에 발을 들여놓은 뒤 김여진은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 '박하사탕' '취화선', 드라마 '죽도록 사랑해' '토지' '대장금' 등에 출연하며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2000년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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