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혜영ㆍ서원대 교양학부 교수
살아가다보면 더러는 행복한 일들도 있고, 때로는 마음에 받은 상처로 온몸의 힘마저 빠지는 순간이 있다. 영화 <경의선>은 삶에서 받은 상처로 가눌 수 없이 무력해진 몸을 이끌고 무작정 경의선에 올라탄 두 남녀가 종점인 임진강 역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의 상처를 나누며 치유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름 모를 아가씨가 자기가 도착하는 역에 매달 간식과 함께 건네준 <샘터>에서 읽은 밝은 메시지를 안내 방송과 함께 담아 승객들에게 소박한 행복을 전해주곤 하던 지하철 기관사 만수는 어느 날 자신이 운전하던 전철에 한 여자가 투신자살을 한 사건에 충격을 받고 특별휴가를 내어 <경의선>에 올랐다. 대학 강사 한나는 연인으로 지내오던 선배교수의 아내에게 모욕을 당하고 우연히 만수와 같은 열차에 오르게 된다.

방향도 의미도 잃은 채, 움직이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가 인적 없는 종착역 임진강 역까지 오게 된 이들은 폭설에 갇혀, 처음에는 서로를 경계하지만, 역을 떠나 함께 길을 걷는 동안, 서로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인근 모텔에 들어가 각자 혼자서 자신의 지친 마음속의 아픈 상처를 풀어놓다가 이어 만수가 방바닥에 돌아누워 독백하듯 한나에게 자신의 아픔을 쏟아내고, 한나는 그의 고백을 들어주기 시작한다.

한나와 만수, 두 사람 모두 타인으로부터, 외부로부터 상처를 받았다. 만수는 자기가 운전하는 전차에 자살한 사람 때문에 상처받았고, 한나는 애인과 그의 아내에게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은 모두 자기 스스로에게 상처를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만수는 좀더 일찍 차를 멈추었더라면 그 사람을 구했을 텐데라는 자책으로 고통스러워한다. 한나는 유학시절부터 외로움 때문에 애인에 기대고, 자기를 전혀 배려해주지 않는 남자에게서 아직까지 헤어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서 깊은 상처를 받은 것이다. 이처럼 이 두 사람이 받은 상처는 어쩌면, 타인이 그들에게 준 상처일 뿐만 아니라 자기 손에 달려 있었던 타인의 불행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이나, 자신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로 인해 자기 자신에게서 받은 상처이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던 마음의 상처를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터놓고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만수는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던 짐에서 벗어나게 된다. 또한 스스로를 무가치한 인간이라고 여기곤 했던 한나 자신 고통스러워하는 만수를 감싸 안아주고, "다시 운전대를 잡을 수 있을까요?"라며 좌절한 만수에게 그를 기다리는 수천 명의 출근길의 사람들을 상기시키며 만수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동안 어느새 자신의 무거운 짐을 벗고 가벼워진다. 그들이 받은 상처가 타인으로부터 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에게서 받는 것이기도 한 것이라면,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상대방에게 내보이면서 위로받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감싸주는 동안 자신의 상처도 함께 치유되어 가는 것이다.

오늘 청주에는 올겨울 들어 내리는 가는 첫눈이 온 천지에 하얗게 흩날리고 있다. 세월이 흐른 뒤 자기가 쓴 작품 <경의선>을 사들고 한나가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경의선> 마지막 장면에서도 오늘처럼 지상에서는 반갑게 눈이 막 내리기 시작하였나 보다. 방송으로 지상의 눈 소식을 전하며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승객들에 기원해주는 지하철 기관사의 따뜻한 목소리에서 한나가 만수를 알아보고 미소를 짓는 순간 영화는 끝을 맺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지하철 역, 거기에 바로 그가 살아가는 의미, 상처를 딛고 일어서게 해주는 축복이 녹아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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