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학자 조재삼(趙在三)이 편찬한 유서(類書)인 송남잡지(松南雜識)에 '근묵자흑(近墨者黑), 근주자적(近朱者赤)'이란 말이 있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지고, 인주를 가까이 하면 붉어진다'는 의미다. 순자(荀子) 권학(勸學) 편에 '마중지봉(麻中之蓬)'이란 말도 있다. '구부러진 쑥도 삼밭에서는 곧게 자란다'는 의미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 제나라 경공(景公) 때 재상 안자(安子)가 한 '강남의 귤을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귤화위지(橘化爲枳)'란 말도 있다. 모두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따지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속한 조직도 일종의 인문환경이다. 사람이 특정 조직에 오래 몸담고 있으면 그 풍토에 익숙해진다. 먹과 가깝게 있으니 자연스럽게 검어지는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조직풍토에 동화될 수밖에 없다. 화장실에 들어가 5분도 채 안 되면 후각이 무뎌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람은 어떤 환경이든 빠르게 적응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조직 풍토에 자연스럽게 물들게 된다. 사람은 또한 학습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조직의 분위기를 쉽게 체득한다. 직장이 사회화의 기구로서 일정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한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일정한 정향이 형성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에 적응하기 곤란하다.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분위기에 동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하다 보면 좋지 못한 관행이나 구태(舊態) 등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귤이라 할지라도 강북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탱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외부에서는 조직의 무엇이 나쁘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보이지만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 이유는 그 풍토에 적응됐기 때문이다. 19세기 초 미국의 정칟사회제도를 예리하게 분석해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토크빌은 프랑스 사람이다. 미국을 9개월간 여행하고 '미국의 민주주주의'란 명저를 남겼다.

미국 사람들이 보지 못한 문제점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어떤 조직이든 변화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변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현실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모든 조직은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변화를 효율적으로 추진하려면 리더십이 중요하다. 많은 경험적 사례연구가 내부에서 발탁된 리더는 변화를 추진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그 조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형성된 얽히고설킨 직연(職緣)과 조직문화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변화를 추진하려면 먹과 인주와 멀리 떨어진 외곽순환도로 밖에 있었던 사람을 가끔씩 리더로 충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인 물은 가끔씩 갈아줘야 한다.



/홍득표 인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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