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의 조직 내에서 우리는 타인들과 더불어 생활하게 될 때 잔잔한 기쁨과 괴로움을 맛보는 동시에 평범하면서도 일반적인 갈등의 조화를 갈망한다. 하지만 더불어 산다는 자체만으로 우리가 항상 조화롭게 살고 있다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더불어 사는 삶을 보다 균형 있고 조화롭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생각이나 감정 등을 주고 받는 수단으로 말을 사용한다. 일상을 만들어가는 수많은 크고 작은 '더불음'의 관계는 말하는 이와 상대방 사이에 셀 수 없이 많은 상호작용 관계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말의 주고받음 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가 가끔씩 무심코 내뱉는 단 한 마디의 말이 상대방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갈 것인가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얼마 전 늦은 나이에 대학교수가 된 선배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항상 나의 우상이어서 선배의 연락이 기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통화 중 선배가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을 알았다. 이유인즉 같은 학과의 나이 어린 교수가 먼저 부임했고 학과장이라는 이유로 소위 '반 토막의 말'을 쓰면서 은근 슬쩍 홀대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며 참기로 했는데 시간이 흘러도 그런 행동이 개선되지 않고 반복돼 선배가 찾아가 조용히 사과를 요구했단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그 동료의 사과는 개선의 의지가 전혀 없는 사과였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나 때문에 기분이 나빴으면 미안하다" 식의 조건부 사과와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다"는, 마지못한 수동형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잘못에 대한 사과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면서 하는 사과는 상대방의 감정을 다치게하고 화를 돋울 뿐이기 때문이다. 향후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개선의 의지를 표현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재발 방지 약속도 하나의 바람직한 방법일 것이다. 물론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어울림에 따라 직분이 달라지게 마련이기 때문에 '나와 너'의 명함이 갈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많은 어울림을 심도 있게 생각해보면서 '나' 라는 말에는 언제나 '상대방'이라는 의미가 어우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그런 의미를 의식하면서 말하면 행동거지가 확연히 달라질 수밖 에 없을 것이다. 어느 조직이든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는 말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는 듣기 좋은 말과, 상대방이 거리감을 느끼고 거부감을 앞세우게 하는 듣기 싫은 말이다. 조직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해서는 듣기 좋은 말을 사용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이런 것에 비춰 볼 때 '상대방'이라는 존재는 '나'라는 존재 위에서 명확해질 수 있고 '나'라는 존재는 '상대방'이라는 존재에 의해 성립될 수 있다. 따라서 서로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언제나 상대방을 먼저 인정하는 정신이 필요한 것 아닐까?



/박기태 건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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