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대종천 입구에 위치한 대왕암 수중릉(大王巖 水中陵 : 사적 제158호)에 대한 전문가들의 입장과 문무왕이 왜로 건너가 제42대 문무천황에 등극한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 글을 마무리 짓기로 하자.

이 세상에는 중국 진시황릉이나 이집트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또는 인도의 타지마할처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청난 규모에 화려한 장식을 갖춘 왕릉이 여럿 존재하지만, 우리나라 또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이한 왕릉이 존재하고 있으니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수중릉이 그것이다. 물론 이곳은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신라 삼보(新羅 三寶) 중 하나인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었다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토함산 석불사로부터 정동쪽의 일직선상, 해안에서 약 2백m 떨어진 감포 앞바다에 네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채 떠 있는 조그만 바위섬에는 십자로 형태로 난 수로가 있고, 그 수로 안에는 마치 관을 닮은 넓적한 대석이 하나 놓여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문왕은 681년 7월 7일 즉위하였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변에 감은사를 세웠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 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는데, 신문왕이 즉위하여 682년에 마쳤다. 금당 계단 아래를 파헤쳐 동쪽에 구멍을 내었으니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한 것이었다. 생각건대 유조로 장골케 한 것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으며, 그 후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통일신라의 기초를 닦은 문무왕이 "나는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으니, 나의 시체를 화장한 후 그 유골을 동해에 안장하라."는 유언과 함께 이승과의 인연을 끊자, 신문왕이 선왕을 화장한 유골을 이 대석 밑에 안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아직까지도 정확한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 각종 설만 난무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주장이 '수중릉(水中陵)'설과 '산골처(散骨處)'설이다.

▲경주 감은사지 3층 석탑
전자는 1967년 7월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로 구성된 신라오악조사단이 제기한 주장으로 "681년 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큰 바위에서 장사지냈다. 바위는 둘레가 200m쯤 되는 천연 암초인데 사방으로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는 물길을 인공적으로 터놓아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게 하였다. 가운데 못에 깔려 있는 거북이 등 모양의 큰 돌은 길이 3.7m·두께 1.45m·너비 2.6m로서 그 밑에 왕의 납골을 모신 용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바위의 안쪽 가운데에서 사방으로 물길을 낸 것은 사리를 보관하는 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발표하면서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가 1967년 7월 24일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유홍준(兪弘濬 : 1949~ ) 문화재청장은『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곳이 문무대왕 뼈를 묻은 곳이 아니라 뿌린 산골처이므로 수중릉이 아니다."며 '수중릉'설을 반박하고 나섬으로써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럼 '수중릉'설의 근거는 무얼까?

먼저 이곳은 암초 중앙부를 파내 한 장의 거석을 덮개석으로 안치하고 그 바닥에 신골을 봉안했는데, 이 거석은 암초에서 채취한 것이 아니라 인근 육지에서 운반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많이 발견되는 고인돌이나 불교에서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목탑을 세울 때 그 중심에 사용되었던 거석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중앙부에 인공을 가하여 동서로 긴 수로를 마련하고 남북으로도 개통했는데, 이는 일종의 용궁을 구상한 것이며, 셋째는 중앙부 거석이 정확히 남북 방위를 향하고 있음을 볼 때 인공적인 작업이 가미되었고, 넷째 암초의 둘레에 대소 12개의 암석이 돌출해 있는 것은 비록 자연의 배치이긴 하지만 십이신장의 의미를 뜻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산골처'설은 첫째, 해중능침의 덮개석으로 주장된 돌은 사리장치를 덮은 인공적인 석관 덮개가 아니고 자연석인데, 그 이유는 덮개석 밑바닥은 돌과의 사이에 공간이 뜨고 그 일부분만 접해 있었기 때문이며, 둘째는 문무왕 비문에 기록된 "나무를 쌓아 장사지내다"느니 "뼈를 부숴 바다에 뿌리다"는 등의 표현이『삼국사기』내용과 똑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오악조사단이 수중릉이라고 주장한 데에는 당시 학계에 만연돼 있던 소위 한탕주의, 즉 5·16 쿠데타 이후 대통령 박정희가 우리 문화유산을 재검토하자는 시류에 편승하여 제대로 된 확인도 없이 성급하게 발표했기 때문으로, '수중릉'설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복개석이라고 주장하는 거북 모양의 돌을 들어내고 납골 장치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는 여러 전문자료로 판단할 때, 우리나라 해수면은 1,300여 년 동안 2m 가량 높아졌으므로 이 덮개석 위의 수심은 최소한 2~2.5m는 돼야 하나, 현재 물의 깊이는 30㎝밖에 되지 않아 당시 이 덮개석은 수면보다 최소한 2m 이상 높은 곳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설은 모두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했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서 펼친 주장일 뿐, '과연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했을까?'라는 의문에는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다만 신기한 일은 문무왕의 화장한 유골을 묻었다고 이야기할 때 듣는 이 모두가 당연히 고개를 끄떡거릴 만큼 이곳의 바위 구조가 절묘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친당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를 피해 마치 신라에서 죽어 장사를 지낸 것처럼 꾸미고는 왜로 망명한 문무왕은 일본 정사서인『일본서기(日本書紀)』에 천무왕과 지통 왕비의 아들 초벽 왕자(草壁 王子)의 차남으로 둔갑된 채 '가락 왕자(駕洛 王子)'란 뜻의 가루왕자(輕王子)로 다시 등장한다.



여기서 잠깐 초벽 왕자의 나이를 먼저 따져보고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자. 초벽은 연개소문이 임신의 난을 일으킨 672년에 다섯 살 정도였으니 살아 있다면 문무천황이 즉위한 697년에는 29세 정도였을 테고, 초벽이 그 나이라면 문무천황은 잘해야 10대 중반에 즉위했다는 것인데, 이 점을 고려해 일본 정사서는 천황의 즉위 연령을 15세로 기록해 두었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이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스스로도 부끄러웠던지『우관초(愚管抄)』에는 "15세에 즉위했으나 몰년은 25세 또는 78세였다."로,『일본황제계도(日本皇帝系圖)』에는 "11년간 다스렸고 45세에 붕어했다."로,『본조황윤소운록(本朝皇胤紹運錄)』에는 "계미년에 탄생해 경운 4년에 65세 또는 35세로 붕어했다."라고 기록돼 있어, 도대체 25세·35세·45세·65세·78세 등 종잡을 수가 없다. 한 인물의 몰년을 기록하면서 25세 또는 78세라는 무려 53세의 오차가 있는 기록을 제대로 된 기록이라 할 수 있을까?



일단 이야기를 다시 진행하기로 하자. 문무천황은 이미 675년에 만난 적이 있던 지통 왕비의 연인이 됐다가 부친인 천무왕이 시해를 당하자, 그녀의 도움으로 당시 권력을 다투던 고시(高市)·대진(大津)·초벽 왕자를 차례차례 제거한 697년, 왜로 망명한 지 16년 만에 문무천황으로 등극하고, 이때부터 11년 동안 고대 일본국의 기틀을 닦는 명군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한다.

▲문무왕 수중릉.

문무천황은 최초로 대보율령(大寶律令)이라는 법령다운 법령을 제정했고, 최초로 돈을 찍는 주전사(鑄錢司)를 두었으며, 또 최초로 길이와 부피를 재는 도량을 정하여 백성에게 나눠 주었고, 역시 최초로 대학을 세워 관리들에게 학문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공자(孔子)에게 제사지내는 석전(釋奠)을 시작했으며, 전국의 길을 두루 닦고 다리를 놓았고, 당과 국교를 새로 열고 신라와는 더욱 활발한 친선외교 정책을 폈다고 한다. 그리하여 천황의 시호 또한 이런 노련한 행정력에 걸맞게 '아마노마무네토요오호지(天之眞宗豊祖父)'라 한다.



그러면 다시 '15세 즉위설'로 돌아가 보자. 11년의 재임 기간을 고려하면 문무천황은 결국 26세에 사망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단 10여 년 만에 '일본 최초' 일색의 치적들을 그렇게도 많이 이루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일본 정사서인『속일본기(續日本記)』의「문무천황 4년 11월조」에 "신라 사신 살찬 김소모가 와서 모왕(母王)의 상을 알렸다."든지, 다시 2년 후 효소왕의 사망 사실을 알리러 신라 사신이 방문했을 때인「문무천황 대보3년 윤사월 신유조」에 "짐이 생각건대 그 번군이 이역에 있다 할지라도 짐이 감싸주며 키웠다는 점에서 실로 사랑하는 자식과 같다. 수명에 끝이 있음은 인륜의 정해진 이치라 해도 이 소식을 들으니 슬픈 생각이 그치질 않는구나."라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15세 즉위설'을 따른다면 채 25세도 안 된 일본 천황이 신라에서 죽은 효소왕을 감싸주고 키워주었다느니 하는 표현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따라서 문무천황이 초벽 왕자의 아들이라는『일본서기』의 주장은 거짓일 수밖에 없으며, 무엇보다도 문무천황의 어머니가 신라에서 죽은 신라인이라면 문무왕 또한 신라 출신임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천황은 그 후 후히토(不比等)의 딸 궁자(宮子)를 왕비로 삼았으나, 지통 왕비가 자신과 천황 사이에 난 당기(當耆 : 686~?)란 딸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심화병으로 사망하자, 문무천황 또한 자기를 진정으로 사모했던 여인을 따라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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