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0일 개봉 '무방비도시'에서 악역 변신

배우 손예진은 한동안 멜로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영화 '연애소설'(2002),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2003),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에서 그는 해맑은 미소로 사랑을 받지만 불치병으로 끝내 숨을 거두는 청순가련한 여자였다.

그는 영화 '작업의 정석'(2005)과 tv 드라마 '연애시대'(2006)에서 다소 바뀐 모습을 선보였다. 몸과 마음에서 배어나온 듯한 그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많은 관객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 역시 로맨스 틀 안에서의 움직임이었을 뿐이다.

그는 내년 1월10일 개봉될 새 영화 '무방비도시'에서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팜 파탈로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직업도 소매치기 조직의 보스다. 그는 처음에는 출연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나머지 캐스팅이 모두 정해진 뒤에야 장고(長考) 끝에 합류했다.

개봉을 2주 앞두고 만난 그는 40분 남짓한 짧은 인터뷰 도중 '관객의 평가가 걱정된다'는 말을 무심결에 세 번이나 했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는 제가 맡기엔 버거워 보였어요. 나중에 우연히 다시 읽어 보니 이 여자의 카리스마 속에 들어 있는 아픔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다시 읽을 때마다 이 여자의 매력이 달라졌고요. 그래서 하게 됐는데 너무 걱정이 돼요. '새로운 모습이니 관객이 좋아해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다가도 바로 '영 싫어하시면 어쩌나' 싶어져요. ('연애시대'로 받은 호평으로 변신에 자신감을 얻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래서 자신 있게 하긴 했는데 막상 개봉할 날이 다가오니까 너무 떨리고 무서운 거예요."
인터뷰가 언론시사회 이전에 진행돼 그의 시도가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평가하기는 이르지만 적어도 예고편에서는 짙은 스모키 눈 화장과 등에 그려진 화려한 문신, 차가운 눈빛, 툭 내뱉는 말투 등은 그에게 꽤 잘 어울려 보인다.

이 같은 평을 전하자 그는 "예고편은 짧으니까 그렇지 아직 알 수 없다"고 솔직하게 대답하면서 "정말 영화를 봐야 잘했는지 알 수 있는데…"라며 다시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말투, 몸짓, 눈빛, 화장까지 평소 모습과 전혀 다른 것을 하려니 고민이 많이 됐어요. 저에게도 백장미(주인공 이름)의 모습이 1% 정도는 숨겨 있을 테니 그걸 끄집어내자고 생각했어요. 제가 기분 좋은 낯설음, 신선함을 보여드리지 못하면 영화 전체가 흔들리는 거죠. 강한 역이라고 소리만 지르는 것보다 절제하고 느낌으로 보여주려 했습니다."
이제까지 한국 영화에서는 썩 매력적인 팜 파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카리스마가 좀 있나 싶으면 금세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급변하기 일쑤인 인물이 대부분. '무방비도시'의 백장미 역시 '알고 보면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데 실망할 관객도 적지 않을 터. 손예진은 그만의 매력적인 팜 파탈을 어떻게 연기했을까.

"밤을 새우고 새벽에 숙소에 들어와서 다시 촬영을 준비해야 했던 적이 있어요. 거울을 봤는데 땀으로 범벅이 돼서 화장도 다 지워지고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거예요. 아, 그렇게 차갑고 냉정한 백장미가 혼자서 펑펑 울고 난 뒤의 진짜 얼굴은 이런 거겠구나, 싶었어요. 감독님께 건의해서 화장 안 한 부은 얼굴로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는 장면을 찍었죠. 처음부터 끝까지 악하기만 한 인물이었다면 저도 차라리 연기하기 편했을 거예요. 인간적인 면이 너무 많이 드러나선 안 돼지만 그런 슬픈 느낌도 이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의 차기작은 베스트셀러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를 스크린으로 옮기는 작품이다. 원작은 이미 결혼한 여자가 남편과 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동시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려 화제가 됐다.

한없이 얄밉고 뻔뻔한 여자가 될 수도 있는 어려운 역할이라고 지적하자 그 역시 "설득력 있게 표현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로서의 목표요? 오히려 어렸을 때는 '1등을 해야지' '최고의 배우가 돼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요샌 그렇지 않아요. 내 매력을 하나에 한정되지 않게, 다양하게 보여 주자고 생각할 뿐이에요. '이 배우가 다음에는 뭘 할까'라고 궁금해지는 배우가 되고 싶은 거죠."
앞으로 '두 명의 남편'을 거느리고 어려운 항해에 나설 이 똑부러지는 여배우의 또 다른 변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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