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복(福)되고 편안하며 자유로운 삶을 원할지라도 욕심과 생각을 단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복이 있어도 화를 일으키고 편안한 가운데에서도 불안한 마음을 간직하며 자유로운 세계에서도 스스로가 구속된 삶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생활이 사람을 구속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생활은 사람을 윤택하게만 할뿐이지 사람을 구속하지 아니하고 현실이 사라을 불안하게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현실은 사람을 일으키기만 할 뿐이지 사람을 불안하게 하지 아니하며 세상이 사람을 재앙으로 이끄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세상은 사람을 생육하기만 할 뿐이지 사람을 재앙으로 이끌지 아니한다. 다만 자신의 삶에서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여 스스로가 구속을 하고 성냄을 다스리지 못하여 스스로가 불안을 일으키며 미혹을 떨구지 못하여 스스로가 재앙을 부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복과 편안함과 자유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 존재의 가치로움을 스스로가 찾아 나서지 않았을 때에 그 사람의 세상은 힘겹고 어두우며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향기로운 마음은 향기로운 말씨로 드러나고 반듯한 마음은 정의로운 행실로 드러나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눈동자처럼 정언(正言)과 정행(正行)은 모두가 반기듯 찾아와 주는 손님이 된다.

그리고 정언과 정행이 손님될 때에 자유와 편안한 것들에서 스스로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 마치 한 바가지의 물이 많아서 항아리에 물이 넘치는 것과 한 바가지의 물이 부족하여서 빗물이 스며드는 항아리와 무슨 차이가 얼마나 있느냐? 와도 같다. 그래서 마음은 항아리 속의 물처럼 부족하여도 스며들고 넘치어도 혼란한 것이다.


멀리에서 귀인이 찾아오기를 바라기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배워야하고 새로운 벗과 새로운 우정을 다지려는 마음보다도 지금의 친구와 함께 더욱 새롭게 우정을 다져야 한다. 하지만 늘상 멀리에서 구(求)하고 늘상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은 마음에서 부족함이 존재하기에 지금의 것에서도 족(足)을 얻지 못하고 이곳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운명이나 인연은 개구리가 튀는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는 것처럼 알기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족(足)과 욕심을 다스린다면 적어도 그 방향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선(善)한 마음으로 이끌면 최소한 선(善)한 운명과 인연을 맺고 자신이 선(善)한 마음으로 타인을 만날 때에 최소한 선(善)한 인연과 운명을 세워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을 만족으로 다스린다면 더러움으로 가는 방향에서 헛됨이 있음을 볼 수가 있고 부정으로 일으키는 욕심을 족(足)함에서 바라다보면 부정함으로 흐르는 자신의 욕심을 볼 수가 있으며 사악함에서 즐기려는 자신의 욕심을 족(足)함으로 바라다보면 사악함으로 흐르는 자신의 죄를 느낄 수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지족(知足)은 운명을 지탱하는 작대기가 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운명에서 스스로가 보람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능히 자신의 선(善)함을 팔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인격적 수양을 갖추고 자신의 참다움을 간직하는 것은 영원한 진리가 되기 때문에 시대와 역사를 통하여 고루 쓸모가 주어지는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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