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의식이 선진화되면서 우리 사회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상류층이 늘고 있다. 기증된 건물인 경우 서양에서는 기증자명을 따라 건물명을 짓는 것이 이미 보편화됐다. 미국 대학의 웬만한 건물은 다 기증자명을 따르고 심지어 대학명조차 그것을 따른다. 서부의 명문 스탠포드 대학은 지난 1899년 땅부자 스탠포드 부부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죽은 외아들을 기억하기 위해 100만 평의 땅을 기부한 것이 오늘의 스탠포드 대학의 시발이다.

이후 성공한 동문들이 앞다퉈 대학 내에 건물을 기증했고 거기서 교육받은 후학들이 창출한 경제적인 효과는 세계 19위 나라의 일 년 총 생산액과 맞먹게 됐다. 철강왕 카네기 멜론은 피츠버그에서 철강 산업으로 부를 거머쥔 후 카네기 멜론 대학을 설립해 교육으로 사회에 이바지했다.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동부의 명문 펜실베니아 대학에도 기증자명을 딴 여러 건물이 있다.

더불어 소액 기부자들을 위해서는 학생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거리의 바닥에 기증자명을 새겨 오가는 이들이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배려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전직이 사서였던 부인 로라 부시를 위해 모교에 도서관을 기증했고, 부시 부부는 텍사스주 댈라스 남부 감리교 대학교에 도서관을 지어 헌정하기도 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건물명을 표시할 때 개인보다는 재단 또는 기업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여러 대학에 생기는 건물명도 기증자인 기업주명보다는 기업명을 주로 사용한다. 그런데 지난해 7월 서울시는벤치 기증 활성화 차원에서 서울 시내 공원과 한강 등 공공장소의 벤치에 기증자명을 새겨주는 '기증자 명칭 표시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벤치는 옥외 광고물 관련 법령상 광고물을 설치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공시설물이다. 기부를 원하는 시민이나 기업이 본인 또는 자사의 이름은 물론 관련 문구와 명언 또는 상징도형이 새겨진 벤치를 설치 희망 장소의 담당 관리 기관에 기증하면 원하는 곳에 설치해준다. 이것이 시행되면 누구나 추억이 깃든 장소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자신만의 벤치를 설치할 수 있게 돼 많은 이들이 참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덩달아 시민들의 휴식장소가 늘어나는 기대효과가 있을 것이다.


서울시는 기증자의 선택의 폭을 넓혀주기 위해 110여 개 서울 우수공공디자인 인증작품과 130여 개 공공시설물 디자인 시민공모전 수상작품 등 다양한 벤치 디자인을 지원할 계획이다. 기증자가 새롭게 제안하는 디자인에 대해서도 공공성, 활용성, 안전성 등 디자인 컨설팅을 제공해 신선하면서도 활용도가 높은 벤치가 설치되도록 할 예정이다. 그리고 벤치 기증자가 자치구로부터 개별 허가를 받아야 하는 불편을 덜어주고, 일관성 있는 명칭 표시로 도시경관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괄 심의할 계획이다.

서울시의 '기증자 명칭 표시제'는 모처럼 소액 기증자를 위한 세심한 배려이자 윈윈 전략이다. 이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돼 액수를 불문하고 여러 방면에서 많은 사람들을 기증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정현숙 열화당책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