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소리가 입(口)에서 생겨날지라도 그 가는 곳은 자취가 없고 자취가 없는 것은 멀리까지 가기 위함이며 크게 가기 위해 자취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취가 없는 것은 신비롭기 그지없으며 그 작용 또한 신비롭다. 그리고 그 신비로운 작용을 사람의 지혜로는 살필 수가 없고 그것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더욱 신비로운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입에서 생겨나는 소리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신비하게도 오랜 세월을 두고 멀리에서 그 결과를 드러나는 것이다. 해서 수행하는 사람의 입(口)이 열리는 것은 지금까지의 정심(正心)이 흔들렸기 때문이고 수행하는 사람의 입이 자주 열리는 것은 정심 가운데에서 외물(外物)에 대한 구(求)함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구(求)함을 약간이나마 구할 수가 있을지라도 결국은 구(求)함이 재앙(災殃)을 구하게 되고 재앙은 다시 정심(正心)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입을 어떻게 단속하고 얼마나 단속을 잘하느냐에 따라서 수행자의 도(道)가 얼마나 지속되느냐의 문제로 남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자의 마음에서 기운이 빠져나가고 마음이 중심을 잃는 것은 스스로가 수행을 버리는 결과가 되고 수행을 하다가 수행을 버리는 것은 애초에 수행을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도 아픔이 크다. 마치 오르려다가 떨어지는 것은 아픔이 더욱 크고 지키다가 잃는 것은 상처가 더욱 크며 가다가 도중에 그만두는 것은 손실이 더욱 큰 것과도 같기 때문에 수행자가 입을 엄숙히 하는 것은 마땅히 그러하다. 그리고 수행자가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것은 이익을 구(求)하려고 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익을 구하려는 생각을 일으키면 마음이 이익을 쫓게 되고 마음이 이익을 따르다 보면 자연히 입을 열어야 하며 입을 열다가 보면 또 다시 이치가 자리를 벗어나는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래서야 수행자가 어떻게 마음의 문(門)인들 열 수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