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회 행우문학회 회원] 지난달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즈음해 긴 연휴가 이어졌다.

나흘이나 되는 연휴를 동생들과 시골의 엄마 집에서 보내기로 하고 모두 모였다. 인천, 전주, 강원도 등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7남매가 모이다보니 친정에 올 때마다 각 고장의 특산물을 가져와 맛있게 나눠먹는다. 인천의 닭강정, 강원도의 수수부꾸미, 귀주 떡 등 한상 떡 벌어질 만큼 푸짐하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많은 자식 키우느라고 고생만 한 우리 엄마, 지금은 더없이 행복하다고 한다. 딸들이 많아서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고향 어르신들도 있다니 새삼 격세지감이 든다. 요즘은 새 옷만 입고 나가도 "이건 또 어떤 딸이 사줬어?" 하신단다.참으로 높게 보였던 뒷동산도 이젠 나지막해 보이고, 누런 늙은 호박이 힘겹게 매달려 있던 흙 담은 기울어져 담이라기보다는 경계라고나 할까? 게다가 빈 집도 여기저기 꽤 눈에 띈다.

이런 우리 동네에 객지에서 온 젊은 부부가 들어와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집에 올 때 마다 마을 입구에 세워둔 농장 간판을 별 생각 없이 보았었다. 그 농장에서 구아바 나무를 싸게 판다고 해 동생들과 함께 사러 나섰다.원래 하우스가 두 동이었는데 연료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 하우스 한 동을 철거해 남는 나무를 싸게 판단다. 구아바 농장은 우리 논이 있는 논틀길 끝에 있었다. 딸 여섯이 차를 몰고 달려가자 농장의 젊은 부부가 반가이 맞아준다. 농장은 블루베리와 구아바를 재배하고 있었다.

농장 바로 앞에 위치한 우리 논을 보니 어릴 적 생각에 울컥함이 치솟는다.

우리 집 보물 1호인 누렁이로 써레질을 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엊그제인 양 선하다. 힘들게 일만 하신 아버지께 새참으로 막걸리를 주전자에 가득 담고는 고추장에 마늘 몇 쪽을 주전자 뚜껑에 얹어 안주로 들고 가면서 홀짝홀짝 한 모금씩 마시던 일이며, 논둑을 스르륵 지나가는 물뱀에게 놀라 혼비백산 달아나던 일. 가을걷이가 늦어져서 얼어버린 볏단을 리어카로 나르다 너무 많이 싣는 바람에 리어카가 그대로 넘어가 낭패를 봤던 일 등…. 온 식구가 나서서 둠벙을 퍼내 미꾸라지를 한양동이나 잡아다 추어탕을 끓여 배불리 먹던 일이며. 40여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그때가 마냥 그립다. 하늘나라에 가신 아버지는 더 더욱 그립고…. 유년의 기억과 아버지에 대한 회상으로 멍하니 서 있는데 "언니 뭐해 다 샀으면 집에 가야지"하며 동생들이 채근한다.

초롱초롱했던 그 시절은 다 지나가고 이제는 나무 이름조차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이가 됐다. 방금 전에 산 구아바 나무를 "이 나무 이름이 이구아나라고 했나? 구마바라고 했나?" 하며 되묻는 사오정이 됐다. 날로 심해지는 건망증에 적잖이 걱정도 되지만 어린 시절뛰놀던 고향에서 묻어나는 향수는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이었다. 덜컹대는 리어카에 옹기종기 매어달려 가도 조금도 불편하다는 생각 없이 다녔던 이 길을 오늘은 튼튼한 네 바퀴가 달린 최신형 자동차를 타고 씽씽 달린다. "그래도 그때가 참 좋았는데"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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