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윤 희(진천군의원)

아름다운 봄날을 정신없이 지나쳤다. 모처럼 한가로운 마음이 들어 둘러보니 여리게 돋아나던 이파리들이 성큼 자라 숲을 이루고 있다. 성하의 녹음을 걸치고 성숙한 모습으로 서 있는 6월을 본다. 오전 커피 한잔을 마시다 마음 편히 지내던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금방 몇몇이 모여 점심을 먹게 됐다.

황태구이 돌솥밥상이 정갈하게 펼쳐진다. 보시기에 담겨 있는 김치를 비롯해 크고 작은 접시에 나물류와 샐러드, 장아찌가 들어 앉아있다, 적당하게 양념 배인 황태구이는 큼지막한 타원형 접시에 점잖게 자리했고, 장떡 옆에 앙증맞은 간장종지도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

오늘의 메뉴가 돌솥밥정식인 관계로 밥주발 놓일 자리에 자그마한 돌솥이, 국 대접 대신 투가리에 청국장이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면서 한상 가득 밥상이 차려졌다. 한국인의 밥상은 품격이 있다. 그 품격은 귀한 음식이 많이 차려져서가 아니라, 음식마다 그 특성에 맞게 들어앉아야 할 그릇에 제대로 들어앉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됐기 때문이다.

내가 결혼할 당시만 해도 여자의 혼수품으로 으레 반상기가 있었다. 반상기는 반찬을 담는 쟁첩의 수에 따라 5첩, 7첩, 9첩, 12첩 반상이 있다. 반상기를 보면 주발, 대접, 보시기, 접시, 종지 등 그릇의 모양과 크기가 각각 다른데 이는 그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생활에서 귀한 손님을 대접하고 싶을 때는 한정식 집을 찾는 경우도 격을 갖춰 접대하려는 마음에서다.

아무리 고급 뷔페식당이라 해도 국이나 스프 그릇을 제외하면 모두 접시다. 커다란 접시에 밥도, 찜도, 야채나 고기도 하다못해 고추장까지 한 접시에 다 올려 먹는다. 뷔페 음식들은 모두 제 담길 자리가 큰 접시인줄 알고 있다. 큰 접시에 담겨야 행세를 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치열한 공방을 거쳐 6·4 지방선거가 모두 끝났다. 선거전을 보면뷔페식당을 방불케 한다.

모두 좋은 음식들이라 어느 것을 먹어야 할지 골라 담다보면 접시가득 쌓인 음식이 잡탕이 돼 있다. 뱃속 든든히 실컷 먹고도 대접 잘 받았다는 기분은 전혀 없다. 유권자가 정치인들에게 갖는 마음도 이와 비슷하리라. 투표결과 표차가 많이 난 경우도, 아깝고 아쉽게 패한 경우도 있다. 박빙의 혼전 끝에 역전승을 당한 경우는 뭔가 모르게 억울한 느낌도 있을 수 있다. 유권자의 공정한 표심으로 인한 결과를 놓고도 역시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 있다. 이런저런 선거 후유증이 만만찮아 보인다.

여러 후보자들은 어느 면에선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이겠지만 모두 큰 그릇에 담길 일은 아니다. 랍스타가 큰 접시에 어울리듯 고추장, 된장은 종지가 어울린다. 종지에 담길 음식이라도 가치가 낮은 건 결코 아니지만 그릇에 어울려야 모양새가 있다. 품격 있는 한국인의 밥상이 그러하듯 사람이든 물건이든 각자 자신의 역할에 맞는 그릇에 담겨 쓰임새 있게 쓰일 때 품격 있어 보인다. 다수의 유권자가 선택한 결과에 승복하고 당선자도, 낙선자도 함께 손잡고 가야하는 것도 정치인이 갖춰야 할 덕목이 아닌가 싶다.

/김윤희(진천군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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