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바로보기(定見)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평소에 정견에 대해 궁금했는데, 불교대학에서 강의를 듣고 알 수 있어 무척 기뻤다. 정견은 바르게 본다는 뜻이지만, 인간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조심하라는 탐진치 삼독 (貪嗔痴 三毒)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정견을 얻기 어렵고, 종교를 떠나 우리 생활 속에서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바로 보는 것이 바른 삶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정견으로부터 여덟 가지의 거룩한 길(八正道)이 이뤄진다. 곧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 이들이 중도로서 눈을 만들어주고, 앎을 만들어주고, 고요함과 명료한 인식과 원만한 깨달음으로 이끌어 준다.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정견은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바로보기를 못하고 그릇된 견해와 대처로 인해 세월호 참사 같은 많은 어려움을 겪은 사례는 수없이 많을 것이다. 정견의 반대말은 사견(邪見), 즉 그릇된 견해다. 자칫 우리는 정견보다 사견으로 보기 쉽다는 생각이 든다.

사견으로는 신견(身見), 아견(我見), 상견(常見), 단견(斷見) 등이 있다. 신견은 오온의 가화합(假和合)으로 생긴 몸을 '자신'으로 잘못 보는 것이고, 아견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나'가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상견은 몸은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고 계속돼 자신을 영원불멸한 존재로 보는 견해다.

단견은 상견의 반대말로써 '영혼 따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게 끝'이라고 보는 견해다.

정견은 이러한 사견(邪見)들에서 벗어나 모든 존재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말하는 무상(無常), 경험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적 고통 뿐 아니라 불만족이나 불충분함도 포함되는 고(苦), 영원히 존재하면서 개체의 정체성(正體性)을 보장해주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진리로 믿고 행(行)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정견이 이뤄지려면 크게 세 가지 덕목을 갖춰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이 덕목들을 제대로 알고 충실하게 행한다면 개인이나 국가나 큰 변혁과 알찬 열매를 얻을 수 있겠다.

첫째, 전견(全見)인데 주어진 대상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확보해 판단해야 한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거나,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정해(正解)를 필요로 한다. 여건상 모든 자료를 확보할 수 없을 때도 바로보기를 포기하지 말고 실상을 바로 봐야 한다.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다 마실 수는 없지 않는가! 한 방울의 바닷물로도 바다가 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작은 자료 하나로도 전체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

셋째, 정견은 직시(直視)를 통해 구현된다. 우리는 고통을 직시해야지 외면해서는 안 된다. 만약 죽음이 닥친다 해도 직시가 이뤄질 때 비로소 정견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김진웅 前 경덕초 교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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