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복)의 논리 가운데에는 寄與(기여)의 論理(논리)가 있다.

즉, 부모님의 사랑을 학생은 학문으로 보답을 하고 군주의 신임을 신하는 충성으로 기여를 하는 것이며, 친구의 우정을 친구는 신의로써 보답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일러서 福중에서도 기여의 복이라 하는 것이다.

마치 강아지가 귀엽고 예쁘다 그래서 강아지로부터 나의 작은 위로를 채웠다면 내가 강아지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고 나무의 그늘에서 내 몸을 편히 쉬었다면 내가 나무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며 새소리에서 나의 영혼의 참다움을 맛봤다면 내가 새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을 해야 하는 것과도 같은 것들을 일러서 기여(寄與)의 법칙이요 상호주의 (相互主義)라고 하는 것이다.

예컨대 인류는 옛날부터 自然(자연)의 은덕으로 인류의 발전을 계속했던 것이다. 처음으로 자연에서 볍씨를 가져왔던 것이 지금의 농업으로 발전을 했고 지금의 산업도 대부분이 자연의 혜택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가 처음으로 자연에서 도둑질하는 씨앗이 됐고 이제는 훔치는 범주가 아닌 害(해)치는 결과까지 이르렀는데도 당연한 사실처럼 생활을 하는 것이다.

자연을 어머님 품과도 같다고 비유를 한다면, 그 어머님은 온갖 고생으로 인류를 키우다보니 허리는 휘어져 토막토막 갈려져 나갔고 머릿결 같던 숲은 듬성듬성 빠져 버렸으며 살 속까지 파고 들어와서 아우성치는 아이들 때문에 피(血)조차도 썩어갔다.

급기야는 대소변의 색깔마저도 검은 회색 빛깔이다. 늙고 쇠약해서 이제는 더 이상 돌보기가 어려운데도 커나가는 그 모습이 너무 좋아서 자연은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언제나 그렇게 웃고 계시고 언제나 맑게 자리를 하며 언제나 고운 머릿결을 손질하시는 우리들의 어머니, 늙어버린 모습 때문에 걱정하고 있을 자식들에게 아직은 괜찮으니 "열심히 살아야 한다"라 하고 말씀을 하시는 듯한 자연의 소리가 있다.

어려서는 어렸기에 어머님의 병들어 가심을 알지 못했고 어려웠을 때에는 어려웠기에 병들어 가심을 알지 못했으리다.

그러나 만약에 가고 없는 그날이 온다면 애태워 찾아 헤매일지라도 오지 않는 세월을 허공중에 흩어져 날리고 히뿌연 안개만이 그렇게 피어오르리다.

그리고 태양은 슬픔을 머금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숲속의 제왕은 역사 속에서 영웅이 돼버린 지가 오래다. 또 숲 속에는 오페라 가수가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어른들을 그저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의 아이들이 있다. 어떻게 말을 하오리까?

가끔씩 들려주는 옛날의 전설에서 태양은 타오르고 하늘은 파랗고 숲속은 푸르름이 가득했다고 아련한 추억으로 이야기 한다.

그렇게 위대한 자연을 재쳐두고서 어떻게 運性(운성)을 이야기하오리까?

아주 위대한 어머님을 말하지 않고서야! 우리들의 후손에게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으리다.

/윤 한 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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