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은 '산성(山城)의 고장'이라 불릴 만큼 산성이 많기로 유명한 곳인데, 아직까지도 100여 개의 산성과 성터가 산재해 있어 일정 지역에 집중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 지역은 특히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의 산성까지 시대적으로도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는데다 보존 상태까지 양호해 문화재 보존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충북도에서는 보은의 삼년산성(三年山城 : 사적 제235호)을 비롯하여,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 : 사적 212호)·단양 온달산성(溫達山城 : 사적 제264호)·괴산 미륵산성(彌勒山城 : 사적 제401호) 등 국가문화재 7건과 충북 지정문화재 10건 등 문화재로 지정된 17개의 산성을 함께 묶어 '한반도 중부 내륙 옛 산성군'이란 이름으로 2010년까지 세계유산에 등재한다는 목표로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고 한다.


그러면 이 가운데 대표적 산성 몇 군데를 살펴보기로 하자.

▲ 보은 삼년산성
'삼년산성'은 보은군 어암리의 평야지대 한복판인 해발 325m의 오항산 정상에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석성이자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으로 신라 자비왕 13년(470) 완성됐는데,『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을 다 쌓는데 3년이 걸려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능선을 따라 견고하게 쌓은 성벽은 13m에서 최고 20m까지 높이가 조금씩 다르며, 성벽은 말 두 필이 지나갈 수 있을 7~8m의 폭을 유지하면서 그 둘레가 1,680m나 이어지는데, 전체 면적 22만 6천㎡의 중심부에는 아미지라는 연못이 있고, 주위 암벽에는 옥필(玉筆)·유사암(有似巖)·아미지(蛾眉池) 등이 음각돼 있어 신라 명필 김생(金生 : 711~791(?))의 필체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의 네 성문은 다른 산성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이로 인해 다른 성들이 방어적 성격을 띤데 반해 이곳은 삼국시대 석성 중에서 유일한 공격형 석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요 특징을 살펴보면 정문인 서문은 깊은 계곡 바로 위에 위치해 있어 적군의 접근이 힘들 뿐만 아니라, 다른 성과는 달리 바깥쪽으로만 문이 열리도록 돼 있고, 설령 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라도 문 안쪽에 바로 연못이 있어 그대로 빠지게 돼 있다. 동문은 'z'자로 꺾여 들어가는 '이중 꺾임 구조'로 돼 있어 성벽 위에서 바로 밑의 적을 공격하기 쉽고, 북문은 문 앞에 두 개의 보조석축을 쌓아 성문 밖으로 's'자형의 길목을 이루도록 하여 이중 차단벽을 형성하면서 옹성 역할을 하고 있다. 끝으로 남문은 성벽 위에 창문처럼 달려 있어 5m가 넘는 사다리가 아니고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등 성문 4곳이 모두 다른 구조로 설계돼 있을 만큼 신라 축성술의 총집합체라 할 수 있다.

성벽의 구축 방법에 있어서도 내·외면 모두 석축으로 수직에 가까운 벽면을 이룸으로써 전형적인 협축공법을 채택했는데, 특히 이 협축성벽은 토사를 전혀 섞지 않은 채 전체를 석축으로만 쌓아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삼국통일의 일등공신 김유신(金庾信)의 조부 김무력(金武力)이 이 지역 출신의 참모였던 장수 도도(都刀)의 도움을 받아 진흥왕 15년(554) 백제 성왕을 비롯한 좌평 4인과 병졸 29,600명을 전사시키고 승기를 잡아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고, 또한 신라 무열왕이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당나라 사신 왕문도(王文度)를 맞이하기도 했는데, 좌위중랑장이었다가 웅진도독으로 임명돼 신라에 파견된 그는 660년 9월 이곳에서 무열왕에게 당 고종의 조서를 전달하다가 그대로 쓰러져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청주 산당산성.


청주 상당구 상당산 정상에 위치한 상당산성은『삼국사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 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바 삼국시대의 토성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현재의 성벽은 임진왜란 때인 선조 29년(1596)에 수축되고 숙종때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진 둘레 4.2km·높이 3~4m·면적 22만 평의 포곡식 석성으로 성곽이 잘 보존돼 있어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성의 정문격인 남문의 정식 명칭은 '공남문' 또는 '공작루'이며, 이 문을 들어서면 바로 안쪽에 돌로 쌓은 옹벽인 '용도'가 나타나는데, 이는 성문으로 침입한 적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시설이다. 옹성을 쌓기가 어려운 이곳의 지형을 고려하여 성 안쪽에다가 이것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여장·치성 등 적을 공격하기 위한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성내에는 1982년에 조성된, 청주의 민속주인 대추주를 판매하는 30여 토속음식점이 터를 잡고 있다. 또한,「상당산성도」를 비롯하여「청주읍성도」등 이곳과 관련된 2점의 그림이 전혀 뜻밖에도 전남 구례군 오미리의 남한 3대 길지 가운데 하나인 금환락지 형국에 자리잡고 있는 운조루(雲鳥樓 : 중요민속자료 제8호)에 보관돼 있다고 하여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편, 이 산성과 관련해서는 선이 아씨와 백룡(白龍)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영조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이인좌(李麟佐)의 난(亂)이 일어나 상당산성을 점령하고 곧바로 인근의 것대산(巨叱大山) 봉수대를 지키는 관군을 살해했을 때 근처에는 '목(睦) 노인'이란 봉화둑지기가 딸 선이 및 그녀와 혼인을 언약한 백룡이란 청년과 함께 살고 있었다.

반란군이 노인 집에 들이닥쳤을 때 백룡은 청주로 돗자리를 팔러 나갔고 선이는 배웅하러 나간 길이었는데 비명 소리에 선이가 급히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이미 죽은 뒤였으며, 이에 선이는 반란을 눈치채고 곧 봉화둑으로 올라가 불을 당겼으나 뒤쫓아온 반란군에게 무참히 살해당하고 말았다.

한참 후 백룡이 돌아와 보니 노인은 죽어 있고 선이도 보이지 않아 급히 봉화대로 올라갔다가 거기서 선이의 주검을 본 백룡은 쇠스랑으로 반란군을 처치하고 노인과 선이의 주검을 봉화불 속에 화장했는데, 그 연기는 하늘로 치솟아 진천·안성을 거쳐 한양 목멱산으로 전해져 그제서야 반란 사실을 알게 된 조정에서 관군을 보내 토벌했다고 한다.

▲단양 온달산성

단양군 영춘면 하리에 위치한 온달산성은 해발 427m의 산 위에 있는 길이 683m의 석축산성으로 성 둘레는 그리 크지 않지만, 비탈의 경사가 70° 남짓한 서쪽 벽의 경우 안벽 높이는 1m 가량인 반면 바깥벽은 10여m나 될 정도로 가파른 곳에다 성을 쌓은 기술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고구려 장수 온달(溫達 : ?~590)이 배수진을 치고 신라군과 싸우기 위해 쌓았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남한강 건너 북서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의 위치나 북서쪽에만 문이 없고 성벽도 특히 높은 점, 성벽 축조방식과 배수구 양식이 경주 남산성(南山城)이나 보은 삼년산성과 유사하거나 동일한 점 등으로 보아 남방에서 진출해온 신라가 북진의 전초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온달 장군은 이 성을 치려다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삼국사기』「온달전」에 의하면, "온달이 신라에 빼앗긴 국토를 되찾기 위해 영양왕 1년(590)에 출정하면서, '계립령과 죽령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며 비장한 출사표를 던졌지만, 안타깝게도 아단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죽었다"는 기록도 등장하고 있다.

이렇듯 가파른 곳에다 성을 쌓았기에 전망이 아주 좋은데, 유홍준 청장은 "산성의 고장이라 할 수 있는 충북에서도 가장 빼어난 산성"이란 평가와 함께, "작은 산봉우리 하나를 하트 모양으로 휘감은 테뫼식 산성으로 남한강의 아름다운 물굽이와 소백산 연화봉의 아리따운 자태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빼어난 전망은 환상적"이라는 감상을 피력하기도 했다.

한편, 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가파른 산길로서, 그 중턱에는 사모정이란 이름의 정자가 있어 한 숨 돌리고 쉬기에는 적당하며, 또 산성으로 오르는 입구에 조성된 온달 관광지의 한 켠에는 온달산성을 축소시킨 모형이 만들어져 있어 산성으로 가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힘든 노약자나 어린이들에게는 안성맞춤이기도 하다.



▲괴산 미륵산성
미륵산성은 괴산군 청천면의 화양동 남쪽에 있는 낙영산과 동쪽의 도명산 정상부를 각각 남북으로 하여 에워싸고 천연의 암벽을 이용하여 축조된 포곡식 석성으로 일명 '도명산성(道明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전체 둘레 5.1km, 외성을 합한 석축만도 3.7k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서 고려시대에 축조되었다.

전체적으로 성벽 상태가 양호한 이 산성은 고려시대의 대규모 산성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지금은 무너져 본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현재 본성 및 외성의 석축이 길이 700m·높이 약 2m 가량으로 남아 있으며, 성 안에서 신라 토기조각과 고려 전기의 기와조각 및 성내 중앙부인 수정골에서는 수정 원석이 발견됐으며, 또한 건물터를 중심으로 도기·자기 조각, 돌절구, 숫돌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성의 특징은 하나의 성에 4가지 공법을 이용하여 축성한 점인데, 성벽 축조는 자연할석을 사용하였고, 안쪽으로는 2∼3단의 계단 모양으로 쌓아 고려 후기에서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축조 기술의 면모가 엿보이며, 성벽의 요소 요소마다에는 네모꼴의 망대를 만들었고, 또한 자연 암반을 파내어 기둥을 세운 흔적도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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