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이 낳은 위인 가운데 우리 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인물이 있으니, 500년이나 지속된 국가운영시스템을 거의 혼자 힘으로 완벽하게 만들어냄으로써 '조선의 설계자'로 평가받는 삼봉 전도전(三峰 鄭道傳 : 1342~1398)이다. 그리하여『1인자를 만든 참모들』이란 정치서적을 쓴 정치평론가 이철희는 한민족 역사에서 필적할 만한 이가 없는 '한국사 최강의 개혁 경세가'로 평가했듯이, 삼봉은 웅대한 구상을 가진 경세가만이 할 수 있는 시대 기획·국가 설계를 통해 조선을 건국한 것만은 누구도 부인 못할 분명한 사실이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 선생이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할 만큼 젊은시절 이곳에서 청유하였다고 전해지는 도담삼봉.


하지만 500년 조선역사는 물론이고 근세까지도 삼봉에 대한 평가는 이 명백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은 채 '고려 말·조선 초의 학자·정치가이자 혁명가'라는 무미건조한 내용, 또는 국사 교과서에서조차도 '경망한 인물이니 분란을 일으키는 인물'로 묘사하는 등 부정적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다행히도 20세기에 들어와 재야사학자 이이화(李離和)는『인물한국사』에서 "흔히 반란을 벌이거나 역적 노릇한 사람쯤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아우로부터 왕의 자리를 빼앗은 이방원이 그 장애인물인 정도전을 제거하고 나서 그에게 온갖 혐의를 씌웠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그는 역신(逆臣)으로 몰려 죽었기에 시호도 내려지지 않았고, 한 사람의 일생을 적어 알리는 행장이나 신도비나 묘비의 글조차 없었다."고 지적하고는 "적어도 고려 말의 정치적·경제적 모순을 바로잡고 사회적 혼돈을 수습하고 나선 혁명가요, 실질적인 통치이념을 정립한 실천적 지식인"이라고 평가하면서, "이런 점을 간과해버리고 한 왕을 높이기 위해 이루어진 곡필만을 믿어서야 죽은 자가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란 문제 제기로 삼봉을 변호했는데, 최근 들어 삼봉을 새롭게 평가하려는 움직임이 활기를 띠고 있어 천만다행이다.

그러면 조선 역사에서 삼봉에 대한 평가가 왜 부정적이었는지, 그리고 현대의 평가는 어떠한지 등을 살펴보면서 삼봉의 인물 탐구를 시작하기로 하자.

태조 3년(1395)에 삼봉이 정당문학(正堂文學) 부재 정총(復齋 鄭摠)과 함께『고려사(高麗史)』를 지어 바치자, 태조 이성계는 "경의 학문은 경서와 역사의 깊은 문제까지 파고 들어갔고, 지식은 고금의 변천을 꿰뚫고 있으며, 공정한 의견은 모두 성인들의 말에서 출발하고, 명확한 평가는 언제나 충실한 것과 간사한 것을 갈라놓았다. 나를 도와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좋은 계책은 정사에 도움이 될 만하고 뛰어난 글재주는 문학 관계의 일을 맡길 만하다. 거기다가 온순한 선비의 기상과 늠름한 재상의 풍채를 갖고 있다. 내가 왕위에 오른 첫날부터 경이 유용한 학식을 갖고 있어 재상으로 임명하고 또한 역사를 맡은 관직까지 겸임하게 하였더니 재상의 직책을 다하면서도 책을 만드는 데서까지 업적을 나타내었다."며 치하했다고 한다. 또한 태조는 술이 거나하게 취할 때마다 "삼봉이 아니면 내가 어찌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그를 존경하고 존경하는 바이다. 으뜸가는 공신이었다."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하지만 삼봉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내가 정도전을 벌주려는 것은 천하만세의 계책을 위함이다. 태조가 그렇게 강하고 현명한 임금이었는데도 정도전과 같은 신하가 나왔다. 하물며 후세에 만일 용렬한 임금, 약한 임금이 있으면 신하가 정도전을 본받아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고 하여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평가를 내린다.

여기서부터 삼봉에 대한 평가는 왜곡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태종의 말에서도 드러났듯 태종 이하 역대 왕들은 삼봉 같은 걸출한 신하의 출현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봉은 조선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망각된 인물로 치부된 것이다.

▲평택 소재 정도전기념관.
삼봉의 이름을 고의로 지운 또 하나의 세력은 사림파(士林派)였다. 그 맥은 여말선초 개혁을 주창한 신흥사대부 중에서 삼봉에 패한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로부터 야은 길재(冶隱 吉再) →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 → 점필재 김종직(?畢齋 金宗直) →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로 이어졌는데, 이들은 조선 건국 후 80~90년 동안 재야에서 절치부심하며 정몽주를 '조종(祖宗)'으로 하는 폐쇄적 '통 이론(統 理論)'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삼봉은 당연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될 터부였다. 특히 사림 역사에서 가장 강하게 '통(統)'과 '예(禮)'를 주장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삼봉을 지칭할 때마다 썼다는 '간신(姦臣)'이란 표현은 그들의 정서를 그대로 대변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오직 권력을 탐한 이방원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쿠데타를 일으켜 동생과 조카를 죽이고 태종과 세조(世祖)로 등극했지만, 이들의 행위는 오히려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되었고, 그 후손들은 권신들에게 휘둘리게 되면서 그들이 그렇게도 지키고자 했던 왕권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거기다 더 가관인 것은 이방원의 참모로서 삼봉을 죽이고 왕권을 탈취한 무인정사(戊寅靖社)의 일등공신 호정 하륜(浩亭 河崙)이나 수양대군의 참모로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절재 김종서(節齋 金宗瑞)를 죽이고 단종(端宗)을 내쫓은 압구정 한명회(狎鷗亭 韓明澮)는 여전히 역사의 영웅으로 미화되고 있으며, 또한 삼봉의 모범적인 신권중심주의를 악용해 자기들의 권력 놀음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당쟁이나 사화도 불사하는 등 삼봉의 신권중심주의의 최대 수혜자가 그들임에도 오히려 삼봉을 간신으로 폄훼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분위기에서도 삼봉을 제대로 평가하려는 작업은 간간이 이루어졌다. 태조가 삼봉을 일컬어 "유종(儒宗)"이라 칭한 이후, 삼봉의 배불운동을 보면서 당시 유학자들은 "유일한 동방의 진유(眞儒)"라 극찬했으며, 개혁을 꿈꾼『홍길동전(洪吉童傳)』의 저자 교산 허균(蛟山 許筠)은 삼봉을 평생 동안 흠모했다고 한다. 또한 개혁군주인 영조(英祖)와 정조(正祖)는 삼봉을 재평가했고, 조선조 마지막 개혁의 주인공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마침내 삼봉을 복권시켰던 것이다.

그러면 현대의 평가는 어떠할까?

1973년 한영우(韓永愚) 전 서울대교수의 기념비적인 저서『정도전 사상의 연구』를 계기로 철학·정치학 분야에서 삼봉 연구가 간헐적으로 이어지다가, 1998년 kbs-tv 대하사극『용의 눈물』에서 부각되면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한 교수는 "당대 호걸 중의 호걸로 정치·경제·국방·사상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변화와 혁명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그 위치가 남다르다."고 평가하면서 "삼봉학(三峰學)이 율곡학(栗谷學)·퇴계학(退溪學)·다산학(茶山學)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학자층이 형성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이런 예측대로 2003년 '삼봉 정도전 선생 기념사업회' 주최의 '제1회 삼봉학 학술회의'가 드디어 개최되었다.

여기서 최상용(崔相龍) 고려대 정외과 명예교수는「정치가 정도전을 생각한다」란 논문을 통해 '정치가로서의 삼봉'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벌이면서 "삼봉은 플라톤(platon)이 말하는 철학(philosophia)·마키아벨리(machiavelli)가 말하는 덕성(virtue)·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하는 책임윤리(verantwortungsethik)가 모두 겸비된 정치가로서 단테(dante)나 마키아벨리를 뛰어넘는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도올 김용옥(金容沃) 또한『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에서 "정치가의 평가란 본시 피비린내 나는 정치권력의 장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과를 냈느냐에 따라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학자나 예술가처럼 무조건 호의적인 평가만 얻을 수 없다."고 전제하고, "우리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정치적 권력에 헌신하고, 그 권력을 공적인 가치로 전환시키는 위대한 정치적 지도자를 갈망한다. 이러한 갈망에 부합되는 인물로서 우리는 삼봉을 뛰어넘는 인물을 우리 역사에서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삼봉은 우리 조선의 역사에서 세계 정치사에 치립할 수 있는 인물로서 내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혁명아요, 프로페셔널 폴리티션일지도 모른다."는 최 교수의 평가에 동의하는 한편, "레닌(lenin)이 마르크시즘에 대한 확고한 자기류의 해석을 완성함으로써 볼세비키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듯이, 삼봉은 주자학에 촉발받아 이념적인 혁명의 틀을 완성함으로써 조선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기에 성공한 정치가이자 사상가"라는 평가를 내렸다.

삼봉의 평가와 관련해 보다 현실정치적 측면에서 접근한 연구자도 있다. 이철희는『1인자를 만든 참모들』에서 참모의 등급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고는 먼저 가장 등급이 높은 '경세가'는 '세상과 시대를 경영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 무릇 경세가는 최소 한 세대는 지속될 시스템이나 정책을 만들어낼 경륜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그 대표적 인물로 삼봉과 장량(張良)을 지명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등급인 '책사'는 '일을 도모하기 위해 책략을 짜내는 사람'으로 정의하면서 삼봉을 죽이는데 앞장선 하륜과 한명회를 대표 인물로 꼽았으며, 가장 하급 참모라 할 '모사꾼'은 '짧은 순간에 유용한 간계나 네거티브한 술수를 꾸미는 사람'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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