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한 출신이던 봉화 정씨(奉化 鄭氏) 가문은 삼봉의 부친 운경(云敬)에 이르러 그의 학문적 재능을 발판으로 출세하는데, 수령 재직시 청렴하고 강직하게 선정을 베푼 것이 후세의 평가를 받아『고려사(高麗史)』「열전(列傳) 양리조(良吏條)」에 등재됐을 만큼 청백리였고, 또한 사후에는 시호를 받을 만한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어도 친우들이 그의 청렴함과 의로움을 기려 염의(廉義) 선생이란 개인 시호도 지어주었다고 한다.


반면 삼봉의 외조모는 종의 혈통을 물려받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런 과거사로 인해 삼봉은 정몽주로부터 "천지(賤地)에서 몸을 일으켜 높은 벼슬에 올랐다."는 인신공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도올 김용옥은 외조부가 영주사족이자 산원 벼슬을 했기 때문에 단양 우씨(丹陽 禹氏)와는 다른 영주 우씨(榮州 禹氏)라고 주장하면서 외조모 혈통에 대한 날조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고려 후기의 충신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이 정도전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가 피살된 선죽교.


한편, 삼봉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단양 지방에 다음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운경이 젊었을 때 한 관상가가 '당신은 10년 뒤에 결혼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얻을 수 있다'고 예언하자, 이 말을 믿은 운경이 10년 간 금강산에 들어가 수양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단양 삼봉(丹陽 三峰)에 이르러 어느 초가에 유숙했는데, 이곳에서 우씨 여자를 만나 정을 나누고 낳은 아이가 정도전이다.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며, 조선개국의 으뜸공신인 삼봉 정도전 (1337∼1398)의 시문과 글을 모은 삼봉집 의 목판.
삼봉은 운경과 우씨 사이에 3남1녀 중 맏이로 태어났는데, '삼봉'이라는 호의 유래와 관련해 한영우 교수는 삼봉이 어릴 때 살았던 개경 부근의 삼각산(三角山)에서 차명했을 가능성을 높게 본 반면, 역사평론가 이덕일은『조선선비살해사건』에서 단양 삼봉에서 딴 것임을 명시하였다.

당시는 외가 출생이 관례였기에 삼봉은 단양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이는데, 부친이 개경에서 벼슬한 탓으로 일찍이 올라와 개경 동남방의 삼각산에서 살았으며,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글공부를 좋아했기에 부친의 친구였던 가정 이곡(稼亭 李穀)의 아들이자 당대 유학자로 명망이 높던 목은 이색(牧隱 李穡) 문하에서 정몽주·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양촌 권근(陽村 權近)·고산 이존오(孤山 李存吾) 등과 함께 성리학을 익히게 된다.

1362년 조정에 나온 삼봉은 충주사록(忠州司祿)을 거쳐 전교주부(典校注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 등으로 승진했으나 공민왕이 총애한 신돈(辛旽)이 국정에 관여하자 실망하여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하고 만다. 그러다가 1366년 부모의 잇단 사망으로 영주에서 여묘살이를 하는 3년 동안 정몽주가 보내준『맹자(孟子)』에 몰두하는데, 이때 삼봉은 맹자(孟子)의 민본사상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된다. 3년상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공민왕이 죽은 부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해 암영전(岩影殿)이라는 집을 지었는데, 삼봉은「원유가(遠遊歌)」를 지어 이 공사를 풍자하기도 했다.

1370년 유교 진흥을 위해 성균관을 개혁하면서 목은 이색이 대사성(大司成)을, 정몽주·이숭인 등 동문수학한 친구들이 교관을 맡자, 이듬해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임명된 삼봉은 다시 태상박사(太常博士)에 특진됐다가 종묘제사에 쓸 악기 만드는 일을 잘 처리한 공으로 예의정랑(禮儀正郞)에 승진했으나, 1374년 그를 아끼던 공민왕이 시해되면서 삼봉의 출세가도에 시련이 닥치기 시작한다.

우왕 원년(1374) 원(元)의 사신이 명(明)나라를 치기 위한 작전을 상의하러 오자,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염흥방(廉興邦) 등 친원파 대신들이 삼봉을 영접사(迎接使)로 임명해 접대하도록 했다. 하지만 삼봉은 "내가 사신의 목을 베어오거나 아니면 체포하여 명나라로 보내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노여움을 사 전라도 나주의 거평부곡으로 유배당한다. 이때 유배를 떠나던 삼봉은「감흥(感興)」이란 시를 통해 자신의 비장한 각오를 다음과 같이 읊기도 했다.



自古有一死 옛부터 사람은 한 번 죽는 것이니

(자고유일사)

偸生非所安 살기를 탐내는 것은 편안한 일이 아니다.

(투생비소안)



▲선죽교 표지석.
귀양지에서「심문천답(心問天答)」을 써서 불교의 인과응보설(因果應報說)과 유교의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불행은 일시적이고 언젠가는 천리가 회복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피력하기도 한 삼봉은 저술에 열중하고 찌든 백성의 생활을 몸소 겪으면서 3년을 보내는 동안 정신적으로 성숙하였다. 삼봉이 그곳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느낀 체험이나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작품이「가난(家難)」·「소재동기(消災洞記)」·「답전부(答田父)」·「금남야인(錦南野人)」같은 명문들인데 나중옌삼봉집(三峰集)』에 실리기도 했다.

1377년 영주로 귀양지가 옮겨진 삼봉은 왜구의 잇단 침입으로 다시 단양·제천·안동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종편거처(從便居處)로 완화되자 개성 옛집으로 돌아와 삼봉재(三峰齋)란 오두막을 짓고 생계 수단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한 재상이 그를 미워해 그의 재실을 헐어버리자 어쩔 수 없이 부평으로 쫓겨갔고, 거기서도 왕(王)모라는 재상이 자기 별장을 만든다며 그의 재옥을 헐어버리는 바람에 다시 김포로 쫓겨가는 등 무려 9년 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겪는다.

조선이 개국한 뒤 삼봉은 여러 요직을 차지하고 건국사업을 주도했기에 저술에 몰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개국 후 출판된 삼봉의 많은 저술들은 실제로 이 기간에 구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봉은 지금 전해지지는 않지만 뒤에 권근의『입학도설(入學圖說)』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유학입문서『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를 저술해 제자들에게 이단을 배척하고 유학(儒學)을 높이는 이론을 가르치면서 친명정책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한편, 불교배척이론을 가다듬는 등 원대한 개혁의 뜻을 다져나갔다. 이렇듯 삼봉의 학문과 개혁사상은 편안한 성균관의 강당이나 따뜻한 안방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거친 들판에서 백성들과 눈물 젖은 밥을 나눠 먹으면서 완성되었기에 일반 성리학자들과는 다른 호탕한 야성과 백성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러던 중 1383년 삼봉은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이던 이성계를 찾아가 인연을 맺음으로써 역사를 바꾸는 만남이 시작되는데, 그의 막사를 찾아 엄격한 군율과 질서정연한 군사들을 보고 그의 참모가 되기로 결심한 삼봉은 군영 앞 노송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심정을 다음의 시로 토로하기도 했다.



蒼茫歲月一株松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창망세월일주송)

生長靑山幾萬重 청산에 자라서 몇 만 겹인가

(생장청산기만중)

好在他年相見否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호재타년상견부)

人間俯仰便陳?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 남겼네.

(인간부앙편진종)

▲고려 후기의 충신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묘소이다. 정몽주는 정도전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1384년 전의부령(典儀副令)으로 돌아온 삼봉은 성절사(聖節使)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 수도 금릉(金陵)에 가서 왕위 교체 사실을 고했고, 귀국해서는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됐으며, 1387년에는 자원하여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으나 조정의 사정으로 오래 머물지 못한 채 돌아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올랐다. 1388년 5월 22일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하여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즉위시키는 등 정권을 잡은 이성계 일파가 삼봉을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하자, 삼봉은 그때까지 게획했던 일들을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사전(私田) 혁파 및 과전법(科田法) 실시였으며, 이로 인해 삼봉은 이색·정몽주 등의 수구파와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이듬해에는 우재 조준(?齋 趙浚)과 함께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등극시킨 공으로 봉화현 충의군(奉化縣 忠義君)에 봉해졌고 수충논도좌명공신(輸忠論道佐命功臣)의 호를 받았지만, 왕에게 형벌과 상을 바르게 시행하라고 건의했다가 수구파에 의해 유배와 함께 공신녹권(功臣綠券)까지 빼앗겼으나, 삼봉 없이는 아무 일도 해낼 수 없었던 이성계의 도움으로 풀려나 고향에 체류하게 된다.

그러나 공양왕 4년(1392)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 중에 낙마한 사건을 기회로 그의 핵심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정몽주가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강회백(姜淮白) 등을 시켜 탄핵상소를 올리고 삼봉·조준·남은(南誾)의 주살을 요구하자, 봉화에서 체포된 삼봉은 보주(甫州) 감옥에 갇히지만,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오른 공양왕의 반대로 인해 죽음은 면하게 된다. 이 위기의 순간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하고 권력을 쥐면서 개경으로 돌아온 삼봉은 다시 충의군에 봉해졌고, 7월 17일 마침내 이성계를 추대해 태조로 모시고 조선왕조를 개국하면서 개국 1등공신이 되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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