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달리기와 높이뛰기 선수로 이름을 날리다 1934년 숙명여고보(현 숙명여중고)에 들어가면서 농구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1926년 창단된 숙명여고보 농구팀은 윤덕주 전 명예회장 외에도 60년대 한국여자농구 최고의 스타 박신자 등을 배출한 한국 여자농구의 효시.
윤 전 명예회장은 4학년이던 1937년 이 학교 농구팀을 전국 최강에 올려놓은 데 이어 졸업후에는 후배들과 함께 숙명구락부라는 일반팀을 만들어 일본 원정을 다니며 일제시대 최고의 센터로 이름을 날렸다.
1944년 결혼 후 한동안 코트를 떠났다가 1947년 두 딸을 둔 어머니 농구선수로서 복귀해 하프타임에 관중석에 올라가 둘째 딸에게 젖을 준 일이나 1950년 다섯 달 반 된 넷째 딸을 임신한 채 코트를 누빈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아이를 업은 윤 전 명예회장의 모습을 보기 위해 농구장을 찾는 이들조차 적지 않을 정도였다.
1950년 현역에서 은퇴한 윤 전 명예회장은 1954년 한국 최초의 여자국가대표팀이 대만을 방문해 친선 순회경기를 펼칠 때 팀의 주무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1960년대에는 대한농구협회 이사 및 부회장을 역임했고, 대한체육회 부회장까지 두루 거치며 행정가로서도 한국 스포츠와 농구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국제농구연맹 중앙집행위원을 비롯해 아시아농구연맹 집행위원과 여성분과위원장 등 주요 직책을 수행하며 국제 농구계에서도 이름을 떨쳤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은 것을 비롯해 대한올림픽위원회 공로상 및 국제올림픽위원회 공로훈장 등을 받았다.
2005년 7월8일 세상을 뜨기 바로 전날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2005 여자프로농구 여름리그 개막식에 참석해 후배 선수들을 격려한 뜨거운 농구 사랑은 지금도 농구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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