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환 시인과 한 권의 책

▲류정환 시인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란 제목을 가진 책이 있다. 1971년 논픽션 작가 디 브라운이 쓴 것으로 백인들의 잔인한 약탈과 그에 맞선 북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의 눈물겨운 투쟁, 그리고 그들의 멸망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인디언 멸망사의 고전이다. 미국 서부 개척사를 뒤집으면 곧 인디언의 멸망사가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거니와, 미국인들이 흔히 용기, 모험 운운하며 내세우는 프런티어 정신이란 결국 인디언들을 죽이고 땅을 빼앗아 차지하는 탐욕의 정신이다.

1992년에 개봉됐던 영화 ‘Far and Away’를 보면 서부로 몰려든 백인들에게 땅을 분양하는 장면이 나온다. 총소리에 따라 출발선을 떠난 참가자들이 말을 타고 달려가서 먼저 깃발을 꽂으면 땅을 차지하게 되는 식인데, 그 아름답고 기름진 땅의 주인은 원래 인디언들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요즘 한미 FTA 협상이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그 결과와 파장을 점치며 온 나라가 긴장하고 있거니와, 예나 지금이나 백인들은 늘 그렇게 막무가내 식이다.

"백인들의 생떼에 응답하는 추장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ㆍ류시화ㆍ김영사
인디언들의 인사말 중에 ‘미타쿠예 오야신’이란 것이 있는데, 번역하면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란 뜻이라고 한다. 이렇듯 정령 신앙을 바탕으로 영혼을 풍요롭게 하며 대지(자연)와 합일된 삶을 살아가던 인디언들에게 바다를 건너온 유럽인들의 생떼는 참으로 곤혹스런 것이었다. 그들의 요구는 대개 땅을 팔라는 것과 종교를 바꾸라는 것이었는데, 그 어느 것도 들어주기 어려운 억지였다. 책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갗는 그 지칠 줄 모르는 백인들의 생떼에 응답하는 인디언 추장들의 연설을 모아 엮은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는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사장, 검은 숲에 걸린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잉잉대는 꿀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의 기억과 가슴속에서는 모두가 신성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수콰미쉬 족과 두와미쉬 족 추장 시애틀의 유명한 연설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들의 화법은 폭포같이 웅장하고 시처럼 영롱하면서도 구체적이다. 왜 땅을 팔 수 없는지, 왜 종교를 바꿀 이유가 없는지에 대해 차분하고도 명료하게 얘기했으나 백인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인디언들은 끝내 땅을 팔지 않았고, 빼앗기는 과정에서 죽거나 척박한 보호구역에 수용되어 생을 마감하는 참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수천 년 역사 속에 풍요롭고 다채로웠던 인디언 문화는 지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 땅에 들어온 백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약속을 했다. 그러나 지켜진 것은 단 하나, 그들은 우리 땅을 먹는다고 장담했고 정말 우리 땅을 먹어치웠다.”― 수우족 추장 붉은 구름의 일갈은 저간의 사정을 말해주는 울부짖음 같은 것이다.

‘나는 왜……’는 금서가 되어야 할 책이다. 그들의 연설은 지구라는 행성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 특히 물질문명을 좇아 달음박질하는 인간들에게 전하는 경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감히 말하건대, 금서가 될 수 없다면, 내용으로 보나 무려 1000쪽에 달하는 분량으로 보나 손닿는 곳에 두고 때때로 펼쳐 보는 경전이 되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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