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포럼] 정연승ㆍ소설가

올해도 어김없이 무심천변에는 벚꽃이 만발했다. 그렇게 봄빛이 완연한 데도 봄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시절 탓일까?

오늘 아침나절 겨우내 낙엽으로 덮여있던 앞마당 뜰을 조심조심 헤집어 보았다. 올 겨울이 그다지 춥지 않았던 때문인지 벌써부터 새 부리만한 새싹이 움을 틔우며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변변찮은 미물도 때가 되면 새로운 세상을 위해 준비를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며 새봄을 맞이할까. 새싹을 만지작거리다가 갑자기 아득함이 느껴졌다.

혼란스러워도 한참 혼란스러운 세상이지만 세상 탓만 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같이 맞붙어 싸워야 하는 걸까.

방관하며 살든, 투쟁을 하며 살든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겠지만 어느 한쪽인가는 선택을 해야만 분명한 자신의 모습이 그려질 것 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논리는 왠지 거부하고 싶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느니, 남이야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든 말든, 남이야 죽든 살든 나만 잘되면 된다.

이런 변칙이 개인을 망치고, 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정도를 저버린 이런 의식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캄캄한 암흑뿐이다.

원칙이 없이 마구잡이로 흘러가는 현실을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진다. 이젠 아침신문도 보기가 싫다.

원칙없이 흘러가는 현실

어렵게 대학을 졸업을 하고 일거리가 없어 배회하며 주눅이 들어 사는 젊은이들의 기사를 보면 울화통이 터진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늘씬하게 패주고도 싶다.

결과에는 분명하게 원인 제공자가 있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을 지거나 사과를 하는 인간다운 인간은 찾을 수 없다. 모두들 정당한 이유가 있다. 빌어먹을.

이제는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 판단하기조차 힘들다. 물건을 잃어버린 놈이 있으면 주인과 도둑놈이 분명 있을 텐데 어떤 놈이 도둑놈이고 주인 놈인지 알 수가 없다.

희한한 세상이다. 귀신도 모른다는 이런 거시기 같은 세월에 무엇을 해야만 세상 한 귀퉁이라도 차지하고 사는 것에 부끄러움을 덜어내는 것일까?

그래도 예전에는 말세라는 말이 종종 등장하곤 했었다. 하기에 말세라는 말이 회자되던 때만 해도 참으로 순수했던 시절이란 생각이 든다.



말세라는 의미 빛을 잃어


말세라는 말의 이면에는 그래도 더러운 것을 가려낼 줄 아는 깨끗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말세라는 말조차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세상이 깨끗해졌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가 아닐까.

깨끗한 물에 검정을 조금 넣으면 흑백이 완연하게 구별되지만 구정물에 맑은 물 한 방울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말세가 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빛을 잃은 것은 전부가 검정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인과 도둑이 구별되지 않고 흰 것과 검은 것도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그저 뒤엉켜 방향도 없이 어디론가 휩쓸려가고 있는 것이다.

꼿꼿한 선비 정신 꽃 피워야

구태여 시시비비를 가려 흑백을 따지자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오늘보다는 내일이 조금은 밝은 미래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비록 혼탁한 세상에 흔적 없이 사라지더라도 한 방울의 맑은 물이 되겠다는 꼿꼿한 선비 정신을 오늘의 세상에 다시 한 번 꽃 피울 때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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