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의 재발견] 라경준ㆍ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사

▲1985년도 실시한 충북 청주시 운천동 흥덕사지 발굴현장.
# 조선 중기까지 금구 사용 주장

청주 흥덕사는 우연하게 발견되었다. 1984년 12월부터 흥덕사지가 위치한 운천동 일대가 택지개발공사 지구로 지정되어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충청북도에서는 1970년 청동으로 만든 범종이 출토되었던 운천동 소재 절터(운천동 CCC회관 북쪽 놀이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선행하기로 하고 청주대학교박물관에 발굴용역을 맡겼다.

당시 운천동 절터 발굴조사단의 조사원으로 있던 청주대학교박물관 박상일연구관이 주변의 일대를 조사하던 중 새로운 절터를 발견하였다. 이 절터는 발굴 중이던 운천동 절터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박상일연구관은 간단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여 1984년 12월 6일에 충북도에 제출하였다. 도에서는 현장 확인과 함께 유적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1985년 1월 11일에 한국토지개발공사 청주지사에 이 절터의 보존을 위해 절터 일대의 공사를 중지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한국토지개발공사 청주지사는 공사를 계속하여 절터의 동쪽 회랑에서 중심에 해당하는 금당지의 유적이 있는 곳까지 훼손이 되었다.

그리고 절터에서 반출되어 조성된 운천동 509-3인 택지 88블록에서 1985년 3월 21일 사직동에 거주하는 개인이 청동으로 만든 북 1점(명문 없음)을 습득하여 골동품상에 넘겼다가 며칠 후 도 관계자에게 신고 접수되어 국고에 환수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 토공 공사에 금당지 유적 훼손

이에 도문화재위원회에서는 1985년 3월 19일 이 절터에 대한 긴급발굴을 결의하였고, 1985년 6월 10일에는 청주대학교박물관에서 이 무명의 절터 발굴조사계획서를 도에 제출하였다.

▲청주 흥덕사 모습
충북도에서는 1985년 7월 2일에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발굴허가를 받아 1985년 7월 19일 청주대학교박물관과 발굴조사 용역을 체결하였다. 발굴조사는 1985년 7월 20일부터 10월 10일까지 훼손되지 않고 현존하는 서쪽 지역을 대상으로 전체적으로 실시하였다.

한편 발굴조사가 진행되던 1985년 9월 21일에 운천동 택지조성공사를 맡은 임광토건주식회사 소속의 임태혁기사가 운천동 477-4인 택지 84블록에서 청동소종, 청동금강저를 비롯한 불기 18점을 습득하여 당국에 신고하자, 이 지역에 대한 부분발굴을 실시하여 9월 29일에 청동금구편 1점과 청동향로 등 18점을 수습하였다.

절터의 발굴조사 결과 청주 흥덕사는 대략 9세기에 창건되어 14세기말에 화재로 인하여 폐사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절터의 동쪽은 이미 파괴된 상태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유적은 동남쪽 일부가 손상된 금당지와 동변부가 유실된 강당지, 그리고 원형이 제대로 남아 있는 서쪽 회랑지와 회랑지 끝에 붙은 건물 등이다.

이 절터의 발굴조사를 끝내고 유적 실측작업을 하던 1985년 10월 8일 절터의 남동쪽 유실부분에서 "甲寅五月 日 西原府興德寺禁口壹坐"라고 선명하게 음각된 청동으로 만든 북(禁口) 파편이 발견 수습됨으로써, 이 절터가 1377년(고려 우왕 3)에 백운화상이 초록한 '직지'를 금속활자로 간행한 흥덕사 터였음이 확인되었다.

이 금구편의 몸통 부분은 1986년 6월 2일 사직동에 거주하는 사람이 산책 중 절 터의 동남쪽 200여m 지점인 운천동 539-3번지인 택지 88블록에서 발견하였다.

이 유물은 충북대학교박물관에 기증되었다가 이 사실을 인지한 도 문화재과 김인재연구관이 6월 5일 회수하여 국고에 귀속시켰다. 흥덕사명 금구편이 발견된지 8개월만이다.

이 몸통 금구 측면에서 "(改)造入重三拾貳斤印" 이라는 명문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금구에 새겨진 명문은 "甲寅五月 日 西原府興德寺禁口壹坐(改)造入重三拾貳斤印"로 판독할 수 있다.

청주 흥덕사 터의 확인은 국내는 물론 외신을 통하여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일부 지도위원이 "원래 흥덕사에서 만든 청동 북을 이 사찰에서 가져다 사용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 흥덕사, 화재로 폐사된 사실 확인

용암동 소재 보살사에서 청주 용두사에서 만든 금구를 조선 중기까지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에 이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이에 충북도는 흥덕사지의 주변지역에 대한 정밀조사를 청주대학교박물관에 의뢰하여 1986년 5월 2일부터 18일간 절터에서 반출된 흙으로 조성된 택지지역을 금속탐지기를 사용하여 정밀 조사하였다.

이 조사로 여러 가지 청동유물이 수습되었는데, 5월 17일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된 84블록지역을 다시 조사하다가 청동으로 만든 불발 측면에 "皇統十年興德寺"라는 명문이 추가로 발견됨에 따라 이곳이 1377년 금속활자로 '직지'를 간행한 청주 흥덕사 터였음이 확증되었다.

흥덕사지 발굴 결과 흥덕사는 화재로 인하여 폐사되었음을 확인되었다. 또한 출토유물의 하한(下限) 편년(編年)이 고려시대로 한정되는 것으로 보아 '직지'가 인쇄된 1377년 7월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흥덕사 폐사와 관련되어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절터에서 200여m 떨어진 84블록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 청동소종·금강저·보당용두·불발 등의 표면에 붉은 산화철 녹이 있고, 철제로 만든 솥 파편이 함께 출토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발견된 청동 불구류는 철제 가마솥에 넣어 보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두환, 직지 중요성 인식‥흥덕사지 사적 315호 지정

1986년 전두환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을 준비 중인 프랑스 정부에서는 박병선 박사를 엘리제궁(프랑스 대통령 관저)에 불러 '직지'와 '외규장각 도서'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4월 15일 차관 협상을 위해 프랑스를 국빈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은 엘리제궁에서 '직지'와 '외규장각 도서'를 친견하였고, 미테랑 대통령의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순조로운 차관협상을 마친 전두환 대통령은 파리에서 박병선 박사와 만나 '직지'와 '외규장각 도서'의 중요성을 인지하였다고 한다.

이 때에 문화재관리국에서도 이 유적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1986년 4월 20일 이원홍문화공보부장관이 현장을 방문하였으며, 4월 25일 문화재위원회의 결의를 거쳐 5월 7일 흥덕사 터를 사적 제315호로 지정하였다.

프랑스 국빈 방문을 마치고 연두 순시하던 전두환 대통령에게 충북도에서는 흥덕사 터의 보존, 정비 계획을 보고하였다. 이 때에 대통령은 흥덕사지 정비 뿐만 아니라 전시관을 세우도록 특별 지시를 내려 1992년 3월 17일 청주고인쇄박물관이 건립·개관되었다.

이 때에 421평으로 건립된 청주고인쇄박물관은 2000년 6월 20일 연건평 1,000평을 증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특히 2001년 독일 구텐베르크박물관과 자매결연을 체결한 후 구텐베르크관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매결연서에 의거 독일 구텐베르크박물관에 한국관을 상설로 설치 운영하고 있다.




▲청주시 직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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