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영호ㆍ청주의료원장

▲ 김영호ㆍ청주의료원장
허리가 기역자로 꼬부라진 할머니 환자 한 분이 늘 쓰레기통을 지팡이 삼아 짚고 병원에 오셨다.

할머니가 병원문에 들어서면서부터 쓰레기통 옮겨놓는 소리가 "퉁-, 퉁-"하고 났다. 힘이 드시는지 "퉁-"소리는 한참만에 나고, 또 한참 있다 나고는 했다.

그러다 소리가 멈추면 할머니가 쓰레기통을 의자대신 깔고 앉아 쉬시는 시간이었다.

쓰레기통은 할머니에게 지팡이도 되고 의자,짐가방도 됐다. 쓰레기통을 깔고 앉아 그 안에서 생수를 꺼내서 물도 드시고, 수건을 꺼내서 땀도 닦으셨다. 언제부터인지 병원식구들은 그 할머니를 '쓰레기통 할머니'로 불렀다.

할머니에게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지 왜 하필 보기 싫게 쓰레기통을 짚고 다니시는지 여쭤 보았다.

할머니는 집에 지팡이가 열 개도 넘는다고 하셨다. 그런데 지팡이를 짚으면 가방을 따로 또 들어야하고, 가방이작으면 여러가지를 많이 못 갖고 다녀서 그렇다고 하셨다.

한번은 쓰레기통 안을 들여다보니 생수와 수건외에도 휴지, 보험카드, 빵과 우유등의 간식까지 들어 있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서 가족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40~50대의 할머니 젊으실 때의 가족사진이라고 설명해주셨다.

할머니 옆에 아저씨 한분이 계셔서 할아버지시냐고 여쭤 보았다. 할머니는 술 마시고 노는거 좋아하더니 젊어서 일찍 죽었다고 하시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으셨다. 영감덕에 죽도록 고생해서 허리가 꼬부라졌다고 하셨다. 자세히 보니 할머니는 손도 기역자, 무릎도 기역자, 허리도 기역자였다.

할머니의 손가락과 무릎, 허리를 보니 죄송한 말이지만마치 짐승의 손 같았다. 손가락 마디 하나 하나에 할머니의 고생하신 세월이 묻어 있었다. 서방님이 일찍 죽어서 홀로 자식 키우고, 출가시키느라고 죽을 고생을 하셨다는 할머니 말씀을 손가락 마디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느날 할머니께서 "원장! 먹고 죽는 약 있으면 줘 봐"하셨다. 할머니 표정은 모든 것을 포기하신 듯했다. 생애의 모든 고비고비를 다 넘기시고, 이제 남은 갈 길을 미련없이 가고 싶다는 말씀은 한동안 내가슴을 찡하게 울렸다.

사는게 별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한줄기 희망을 갖고 사는게 보통 사람들인데 그 마지막 희망마저도 이제는 없다는 할머니 말씀에 인생이 이런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생로병사의 길을 가지만 자기가 늙어가고, 죽어가고, 시들어가는 것을 눈으로 봐가며 산다는 것은 고통일 것이다.

오죽하면 고려장이 있었을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고려장의 많은 경우에는 아마도 본인들이 원하고, 또 승낙해서 이뤄졌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병원에 오는 대부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쓰레기통 할머니하고 같은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의 고통과 그리고 홀로 있다는 외로움은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쓰레기통 할머니의 외로움이 갑자기 나에게도 피부로 느껴졌다. '나도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죽어갈텐데…' 먹고 죽는 약을 달라던 할머니의 말씀이 귓가를 맴 돌았다.

진료실문을 나가시는 쓰레기통할머니의 "퉁-, 퉁-"소리가 내 가슴에 세차게 울려왔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