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익 칼럼] 본지 객설논설위원ㆍ시인ㆍ주성대 강사

개나리 진달래 목련 따위가 이내 지고 수수꽃다리가 만개하더니 이 꽃조차 지기 시작한다.

수수꽃다리는 영어로는 라일락이고 불어로는 릴락, 한자명은 정향(丁香)인 꽃이다.

촘촘히 들어박힌 꽃떨기가 흡사 수수를 연상케 하여 붙여진 이름이리라. 마당 한 구석에서 꽃 피워 내뿜는 향기가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하더니 어느새 꽃잎이 한 잎 두 잎 지는 요즈음이다.

원산지는 유럽인데 우리나라엔 일본을 거쳐 전해진 것으로 안다. 번식력이 강하여 접목을 해도 잘 산다. 그리고 나무에 벌레가 끼지 않아 한여름에도 푸른 잎사귀가 너울거려 운치를 잃지 않는다.

꽃말은 파이프[管]라는 뜻인데 터키인들은 그 가지로 피리를 만들어 불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 꽃 수수꽃다리는 내로라하는 시인과 작가들에게 사랑받던 꽃이다. 엘리어트의 '4월은 잔인한 달…'은 얼어붙은 땅에서 라일락 뿌리를 흔들어 깨우는 시이고 자연시인 휘트먼도 '나는 영원히 돌아가는 봄을 애도했고 또 애도할 것이다'고 읊어 수수꽃다리가 지고 난 봄을 애도하였다.

그런가 하면 톨스토이의 명작 '부활'에 등장하는 카추샤는 네플류도프 공작을 뒤따르며 얼굴을 붉힌다.

카추샤는 이 꽃을 꺾어 한 가지는 자신의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또 한 가지는 네플류도프에게 연모의 징표로 준다.

설사 소설이 아니더라도 그 화사한 색깔과 진한 향기는 로맨틱한 서정적 매개물로써 청순한 카추샤의 마음을 흔들고도 남음이 있었을 게다.

수수꽃다리의 색깔은 백색과 자색 그리고 벽자색이 있다. 이 중 백색의 꽃이 청결한 신선감도 주려니와 향기가 높다.

개화는 다른 꽃들에 비해 한 발 늦지만 그 진한 향기가 온 마을에 진동하면 골목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웃으면서 인사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

설사 그 동안 서운하고 못마땅한 일이 있을지라도 봄은 화해와 용서의 계절이 아닌가.

천하 만물이 힘찬 성장을 하는 이 좋은 계절에 무에 그리 화해 못하고 용서하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이 아침, 더러워진 내 귀를 씻은 후 하얀 꽃그늘 아래서 향기 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바야흐로 낙화 철. 늦봄에는 많은 꽃들이 진다. 수수꽃다리를 비롯한 낙화를 보며 우리 선인들은 삶을 어떻게 노래하였는가?

조선조 경종 때의 시인 박상립(朴尙立)은 '임거 (林居)'라는 시에서 모춘의 심경을 이렇게 읊었다.

산집이 적적한데 낮 그늘 비껴 있고

뜰 가득 푸른 이끼 반만 깔린 낙화로다


홀로 냇가에 와 뉘 함께 짝했는고?

저물도록 물새들과 울멍줄멍 서 있었네


명리에서 벗어난 허정한 경지에서는 물아일체가 된다고 한다.

모든 자연물과 동화되어 친밀감을 느끼게 되겠으나 해종일 그냥 하염없이 서 있었다니 믿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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