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의 재발견] 8. 직지 이전의 금속활자의 역사와 제작과정

▲ 직지 간행과 관련이 깊은 팔만대장경,


우리가 흔히 '직지'를 설명할 때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 아니라 현존하는 금속활자본 중 가장 오래된 책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는 '직지'이전에 우리나라에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사용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전기에는 목판인쇄가 발달하여 유교와 불교 양대 문화가 발전하였다. 이 당시에는 문물제도가 잘 정비되었기 때문에 인쇄문화가 더욱 발달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후기로 접어들면서 이자겸·묘청의 난과 무신난 등으로 인하여 여러 기관에 비치된 귀중한 서적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고려 전기 소장 장서(藏書)의 규모는 대단하여 송(宋)나라에서 조차 서적을 요청할 정도였다.

이자겸·묘청의 난과 무신난이 최충헌에 의해 수습되고, 세상이 안정되자 책의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많은 서적이 소실(燒失)되고 소진(消盡)되어, 비용과 시간이 많이 걸리는 목판인쇄로는 필요한 책의 수요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 청주 인쇄 박물관에 전시된 직지가 인쇄되는 과정을 연출한 모형 인형.
'고려무신난 이후 책 수요 급증 … 활자 필요성 대두


또한 한정되어 있는 문신(학자)들이 한 종류의 책을 많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다양한 책을 요구하였다.

이러다 보니 기존의 목판인쇄로는 도저히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목판인쇄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요구되었다.

즉, 글자가 고정되어 한 가지 종류의 책만을 찍는 것이 아니라 글자가 움직여서 수시로 여러 종류의 책을 찍어낼 수 있는 활자 인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금속활자 인쇄의 실용화와 관련하여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13세기에는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가장 빠른 시기의 책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지만, 기록에 근거하여 볼 때 13세기에는 한국에서 금속활자 인쇄가 실용화된 것으로 보인다.

'상정예문' 금속활자로 첫번째 찍어 널리 배포

13세기 학자이자 관료였던 이규보(1168∼1241)의 문집인 '동국이상국후집(東國李相國後集)'에 진양공(晉陽公) 최이(崔怡)를 대신하여 1234~1241년 사이에 지은 '신인상정예문발미(新印詳定禮文跋尾)'에 따르면 "금속활자(鑄字)를 사용하여 '상정예문(詳定禮文)' 28부를 찍어 여러 관청에 나누어 간직하게 했다." 는 기록이 있다.

▲팔만대장경.
한편 고종 26년(1239)에 금속활자로 찍어낸 책을 다시 목판으로 새기어 인쇄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1책(목판본, 삼성출판박물관 소장)이 현재 보물 제758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 책의 끝 부분에 진양공 최이가 쓴 발문이 있다. 이 발문에 따르면,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찾는 이가 많기 때문에 고종 26년(1239, 乙巳)에 기존의 금속활자본을 근간으로 하여 다시 목판으로 새긴 후 인쇄하여 널리 배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인상정예문'과 '남명천화상송증도가'로 볼 때, 늦어도 13세기인 1200년대 초기에는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늦어도 1200년대에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사용했음을 증명해주는 '신인상정예문'과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금속활자 인쇄본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책과 관련된 기록으로 인하여 한국이 13세기에 금속활자를 발명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직지'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 아니라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된 이유이다.

중앙관청의 금속활자 인쇄는 그 뒤 원나라(몽골)의 굴욕적인 지배로 학문이 위축되자 그 기능이 마비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14세기 말에 원나라가 중국에서 신흥세력인 명나라에 의하여 북쪽으로 쫓겨 가자 고려에서도 주권의 복구의식이 대두되었다. 이에 힘입어 마침내 관청에 종전처럼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하였다.

또한 서적포에서 금속활자를 만들어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책은 물론 의방서(醫方書), 병서(兵書), 율서(律書)에 이르기까지 고루 찍어 배포하여 학문에 뜻을 둔 이들의 독서를 널리 권장하여야 한다는 건의가 제기되었다.

그에 따라 1392년 정월에 제도상으로 서적원(書籍院)을 설치하고 활자 인쇄 업무를 관장하는 영(令)과 승(丞)의 직책을 두었다.

고려시대 금속활자 인쇄본 중에서 현재 전해지는 것은 '직지'뿐이다. 이 책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것으로 중앙 정부나 주요 사찰 뿐 만 아니라 지방의 사찰에서도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흥덕사에서 만들어진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찍어낸 '자비도량참법집해(慈悲道場懺法集解)'을 다시 목판으로 새기어 인쇄한 번각본도 전래되고 있다.



<고려 금속활자의 산파역 최이>



본명은 최우(瑀)였으나 뒤에 최이(怡)로 개명하였다. 1219년(고종 6)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오늘날 청와대비서실장)로 아버지 최충헌(忠獻)의 뒤를 이어 2대 최씨무신정권의 1인자가 되었다.

최이는 집권 후 아버지가 축재한 금은보화 등을 왕에게 바치고 부당하게 탈취했던 토지를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또한 가난한 선비를 등용하는 한편, 아버지 최충헌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괴롭히던 관리와 아우 최향(珦)을 유배 또는 파면시켜 민심을 수습했다.

1222(고종 9)년 참지정사(參知政事)·이병부상서(吏兵部尙書)·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어 명실공히 집정자(執政者)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한편 자주 금품을 요구하는 몽골 사신을 냉대하고, 북쪽 국경의 여러 성곽과 개경(開京)의 황성과 라성을 수축, 몽골의 침입에 대처했다.

1225(고종 12)년 자택에 정방(政房)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했고, 1227년 서방(書房)을 설치하여 문신들을 등용했다. 또한 기존의 도방(都房)을 확장하여 사병(私兵)을 증강시켰다.

팔만대장경판 완성 등‥인쇄기술사로 많은 공헌

북쪽의 몽골 대군이 침공하리라는 소식에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고 성곽을 쌓아 대비했다. 그 공으로 1234(고종 21)년 진양후(晉陽侯)에 책봉되었다.

또한 사재를 희사, 팔만대장경판을 완성케 하고 '남명천화상송증도가'와 '상정예문'을 금속활자로 인쇄하는 등 인쇄기술사 적으로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상정예문'은 고려 인종(1122∼1146)의 명령으로 당시 평장사였던 최윤의 등 17명의 신하들이 편찬한 책으로 모두 50권으로 되어 있는 예서이다.

'상정예문'이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책장이 탈락되고 글자가 결락되어 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워 최이의 선친인 최충헌이 이를 보완하여 두부를 완성한 다음 한부는 예관(오늘날 외교·문화·교육부에 해당)에, 다른 한부는 자신의 집에 두었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할 때 예관의 것은 가져오지 못하여 소실되었고, 최이의 집안 소 장본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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