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주 칼럼] 2007년 5월 23일

중국 연변자치주의 조선족 마을 중에 '정암촌'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충북 출신 주민들이 모여 살고 있어 중국의 작은 충청도라 부른다. 연

길시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쯤 가면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도문시가 나오고 도문에서 30여분을 달리면 우리나라의 면 단위격인 양수진이 있다. 이곳에서 10여분 농촌길을 달리면 정암촌 마을이다.

정암촌(亭岩村)은 마을 뒷산에 정자처럼 생긴 큰 바위가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이름도 당시 이주한 주민들에 의해 지어졌다.

이곳은 1938년 일본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충북 출신 주민들이 집단 이주하면서 충청도 마을이 됐다. 이들은 척박한 만주 벌판에서 농사를 지으며 억세게 살아왔다.

이 마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도, 충북대 임동철 총장 등 학계와 충북도청 공무원 등이 '정암회'를 조직해 이들을 후원하면서 부터다.

이들은 매년 정암촌을 방문하여 주민들을 위로하고 물질적인 도움도 주고 있다.

임 총장은 '청주아리랑'을 이곳에서 발굴하여 발표하기도 했다. 임 총장의 정암촌 사랑은 남다르다. 그는 매년 정암촌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송아지를 사서 기증하기도 한다.

또 이곳 주민들을 매년 3명씩 충북으로 초청 농촌 연수를 시키고 있다. 그는 스스로 정암촌 이장이라고 말할 정도다.

정암촌 주민들은 가난하지만 소박하게 산다. 농사를 지으며 욕심없이 사는 모습이 흡사 70년대 우리나라 농촌을 보는 듯 하다. 농악대가 있어 귀한 손님이 오면 풍악으로 환영하고 돼지를 잡아 대접하기도 한다.

그들이 만드는 음식도 모두 충청도 식이다. 정암촌은 중국에서도 모범 마을로 손꼽힌다. 우리나라의 새마을 사업 처럼 마을길도 포장하고 초가집을 걷어내고 기와로 정비했다.

이같은 사업은 중국 정부가 지원을 했는데 충북도민들이 정암촌을 자주 찾아 특별지원을 했다는 후문도 있다.

이 마을에는 아직도 10여가구의 초가집이 그대로 남아있다.귀틀집, 격자문 등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으로 지은 집들이다. 한국의 전통 초가집을 보려면 정암촌에 가면 잘 관찰할 수 있다.

이 마을 이순구(68·충북 옥천군 안남면 지수리 출신)씨가 이곳에 온 것은 1938년. 어머니 뱃속에서 만주행 열차를 탄후 정암촌에서 태어났다.

이주민 1.5세인 셈이다. 촌장 유영달(48)씨는 정암촌에서 태어난 2세이다. 이주 1세대는 거의 사망하고 1.5세대나 2세대만이 살고 있는 셈이다.

일제는 만주국을 건설한후 조선인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고 선만척식주식회사와 만선척식유한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들 회사를 통해 실시한 강제 이민에 총 9600여세대, 5만여명이 이주했으며 현재도 정암촌을 비롯해 경상도 마을, 전라도 마을 등이 대부분 이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해방이 되자 정암촌 사람들은 상당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남아 지금까지 살고 있다.

전성기에는 900여명의 인구가 있었을 정도로 번창했으나 지금은 80여가구에 250여명이 모여 농사를 지으며 산다.

정암촌을 사랑하는 것은 충청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형제인 이들에게 도민들이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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