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상록ㆍ前호남고속전철유치위원회 위원장

▲이상록ㆍ前호남고속전철유치위원회 위원장
학교법인 청석학원의 설립자 형제인 청암(淸巖) 김원근(金元根)선생과 석정(錫定) 김영근(金永根)선생의 삶은 질곡 속에서 벗어나 멋있는 참 삶을 누린 분이다.

이러한 성공의 비결은 기본적인 것이다. 청암선생과 석정선생의 축재와 사회환원과 봉사가 만인의 뇌리 속에 남고, 또한 두 분의 위대한 삶이 평범하면서도 일관된 삶의 의지가 관류(貫流)되고 있음을 볼 때, 두 분의 삶의 성공 길에 대한 처세와 고귀한 인생철학이 몸에 배 동화된 것이 아닌가 싶다.

청암 석정 형제분은 한말에 출생하여 철이 들기 전에 환란을 입어 고아와 같은 어린 시절과 이어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국권을 상실한 망국지변을 당하면서 자립의 가시밭길을 걸어 나오기까지 어린가슴 속에 망국의 한을 품고 고된 삶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우선 먹고 살며 가정을 꾸려가기 위한 방편으로 밑천 없는 상업에 눈 돌려 초지일관 근검성실과 겸허한 자세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우선 돈을 벌어야 된다는 일념으로 삶을 시작했고 번 돈을 긴요하게 쓸 때에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성재(成財)의 철학과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종교적 신념으로 점철된 생애를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치원에 근거를 두고 일어선 형제는 청암선생이 약관 그 해인 1916년에 연청학원(燕靑學院)을 설립하여 우매했던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눈을 뜨게 하고 주판과 장부조직의 교육을 시켜 부를 창출하여 일제의 식민지 사슬에서 벗어나 자주적 자립인으로 육성하기 위한 첫 육영사업을 시작하셨다.

애국적민족의 계몽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겨레를 사랑하고 자주적 독립정신을 육성하기 위한 시발이다.

1918년에는 조치원중학교 설립을 위하여 매년 벼 천석의 쾌척과 현금 5만원을 기금으로 설립허가를 신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한 청년회관 건립을 시도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 역시 민족교육의 절실함을 간파한 애국정신이 아닐 수 없다. 괄시하는 일제의 마수를 피해 청암선생은 1922년 청주로 이사하셨다.

형님 곁을 떠나 원산에서 해산물상을 시작한 석정선생은 1924년에 조치원상업학교 설립기금으로 3만원을 기탁함은 물론 동경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셨다.

청암선생이 청주로 이사한 직후인 1924년 6월 1일에 경영난에 봉착했던 대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수업료 없는 학교 운영을 실시했다.

1919년 3·1운동을 통하여 교육구국의 신념을 형제분은 간직하고 애국심 함양교육에 전념했다.

1935년에 재단법인 청주상업학교를 설립하였으니 이는 일제의 권력에 항거하기 위한 한국 젊은이의 상업정신 함양, 경제력의 신장만이 일제를 제압할 수 있다는 교육구국의 정신의 발로라 하겠다.

1945년 3월 1일에 청주여자상업학교를 설립하니 여성교육의 효시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경사라 아니할 수 없었다. 남녀평등교육의 필요성을 간파한 혜안의 소산이다.

1941년에 청주사범학교설립 당시에 형제 분은 벽돌건물 630평을 건립, 기증하셨으니 내 학교도 중요하지만 한국의 청소년교육의 필요성을 간직하신 교육구국의 일념이었다.

1946년에 역사적인 한강이남의 제1호 인가인 청주상과대학의 설립을 이루었다. 당시에 서울에 보성전문학교를 고려대학으로 연희전문학교를 연희대학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이화대학으로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숙명여자전문학교로 인가한 직후의 경사였다.

바로 이 창학정신이 두 형제분의 인생철학이요 삶의 보람과 가치를 상징한 것이다.



※ 이 기고는 5월22일 청주대학교 개교 60주년을 기념해 열린'청주대학교 설립자 육영사상 조명을 위한 심포지움'에서 주제발표한 내용을 요약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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