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랭 드 뿔랑시가 수집후 반출

`직지`는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초 한국에 와 있던 프랑스 공사인 꼴랭 드 뿔랑시(Collin de Plancy)라는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수집하여 프랑스로 갖고 간 것이다.

꼴랭 드 뿔랑시는 원래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동양어학교에서 중국어를 공부한 후 1877년 중국에 있는 프랑스공사관 통역으로 중국 북경에서 6년 동안 근무했다.

꼴랭 드 뿔랑시는 1888년 초대 한국 주재 대리공사로 임명되어 1891년까지 서울에 머물렀다.

그때부터 한국의 도자기와 고서(古書)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대사관의 서기관으로 서울에 부임해온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d)에게 책의 목록을 만들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한국에 머무는 3년 동안 1년에 한번씩 많은 양의 책을 수집해 모교(母校)인 프랑스의 동양어학교에 보냈는데, 이때 꼴랭 드 뿔랑시가 보낸 책이 동양어학교 최초의 한국관련 책이 되었다.

그 후 5년간 일본에 근무한 그는 다시 한국 주재 프랑스 공사로 임명되어 1896년부터 1906년까지 10년간 총영사 겸 서울주재 공사로 한국에 머물렀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우리나라에 두 차례씩이나 머물면서 동양에 대한 폭넓은 교양을 바탕으로 옛날 책들을 수집하였다.

그 중 가장 뛰어난 수집품은 1377년에 금속활자로 인쇄된`직지`하권 1책이다.

1896∼1900년 소장 추정



그러나 이 책을 언제 수집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초대공사로 재직할 때인 1889년 5월 부임한 모리스 꾸랑이 1894년에서 1896년에 간행한 `조선서지(전 3권)`라는 책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의 3분의 1가량은 꼴랭 드 뿔랑시가 쓴 것으로 보아 당시 소장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소개되었을 것이다.



▲꼴랭드 쁠랑시 공사가 조선 공사로 근무하면서 수집했던 물건들.
그 후 1901년 간행된 `조선서지`의 부록 편에`직지`가 실린 것으로 보아 두 번째 서울에 있을 때인 1896년부터 1901년 사이에 수집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소개된 자료에 의하면 `직지`는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한국관에 전시된 것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직지`는 1896년부터 1900년 사이에 꼴랭 드 뿔랑시가 소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꼴랭 드 쁠랑시는 1902년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 설치에 도움을 준 공로로 고종황제로부터 특별히 훈 1등을 받고 태극훈장을 수여받았다.

`朝鮮書誌`로 최초 소개

`조선서지`는 `직지`를 처음으로 소개한 책이다. `조선서지`는 모리스 꾸랑이 만든 책으로 1899년까지 한국에서 나온 3,821종의 옛 책들을 간단히 설명하고 책이 있는 장소, 기록의 근거, 사진 등을 수록한 한국 고서의 목록 겸 풀이집이다. 1901년에 부록으로 간행된 책의 부록 3738(70-71쪽)로 `직지`에 대하여 기록이 되어 있다.

그 기록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3738.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1책. 대 8 절판(제 2권만 있음).

C.P., B.N. Coreen, 109.

"1377년 淸州牧外 興德寺에서 주조된 활자로 인쇄됨." 이 내용이 정확하다면 鑄字, 즉 활자는 활자의 발명을 공적으로 삼는 조선시대 太宗의 命(1673)보다 26년 가량 앞서 사용된 것이다. 그 외에도 宣光 7年이라고 쓴 연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宣光이라는 통지연대의 명칭은 1371년 元朝의 왕위계승을 요구하는 昭宗에 의해 채택된 것이다.

1911년 3월 27일과 3월 30일에 드루오 경매장에서 한국·중국·일본 관계의 꼴랭 드 쁠랑시 소장품 883점에 대한 물품 경매가 있었다. 이 때는 한국의 물품이 주를 이루어 그 양이 700여점에 달하였다.

직지`는 그의 물품 경매 때에 골동품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Vebel)가 180프랑(francs)에 구입 소장하였다. 그 후 앙리 베베르의 유언장에 의하여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어 도서번호 109번(COREEN 109) 기증번호 9832번으로 현재까지 보관되고 있다.

<조선서지의 저자 모리스 꾸랑>





조선서지`의 저자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 1865~1935)은 1865년 10월 12일 프랑스 파리의 프랑크랭가 6번지에서 샤를르 이지도르 꾸랑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모리스 꾸랑은 1883년 파리대학 법과에 입학하였다. 2년 후인 1885년 법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동양어학교에 등록, 중국어와 일본어 공부를 시작하여 1888년 졸업했다.



당시 동양어학교 졸업생의 주요 진출로는 외무성 통역관직이었다. 모리스 꾸랑은 1888년 9월 6일부터 북경 주재 불란서 공사관에서 통역 실습생으로 근무하였다.



1890년 5월 23일 모리스 꾸랑은 북경에서 서울 공사관으로 전속하였다. 이 당시 조선 주재 불란서 외교관은 모리스 꾸랑 이외에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가 공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꼴랭 드 쁠랑시는 1891년 6월 15일 동경으로 발령을 받은 후, 1895년 다시 서울로 돌아와 1906년까지 조선에 머물렀다. 꼴랭 드 쁠랑시는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직지`등 고서적과 예술품들을 수집하였다.



꼴랭 드 쁠랑시는 자신이 수집한 고서적들의 해제를 모리스 꾸랑에게 제안하였고,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조선서지`이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책은 꼴랭 드 쁠랑시가 두번의 서울 체재기간 동안 수집한 것이다.



꼴랭 드 쁠랑시는 이 같은 작업 속에서 `직지`를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모리스 꾸랑은 `조선서지`에서 `직지`의 가치를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즉 1377년 청주목외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고, 조선 태종의 명령으로 403년 만든 계미자보다 26년 앞선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리스 꾸랑은 `직지`의 가치를 정확히 이해한 최초의 서양인이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