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편> 충주 인사 중심으로 교조신원 운동

▲남한강에 자리잡은 기흥 일본군 병영터. 현재는 보건소 건물이 들어서 있다.



최시형은 단양을 교두보로 남한강의 요지 충주를 빈번하게 드나들며 포덕에 힘썼다.

최시형은 1891년 12월 충주 외서촌(外西村) 신재련의 집으로 이주했다가 이듬해 1월 진천 부창리로 이주하여 동학의 중심 세력이 청주 내륙으로 이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최시형은 1892년 8월21일 신재련에게 착실한 인재 40명을 골라 명부를 작성하여 9월10일까지 도소로 보내도록 편지를 보낸다.

이는 교조 신원운동을 위한 준비로 보이며, 이 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동학혁명 당시에 동학토벌의 공을 세운 것을 기려서 세운 일본군 공적비. 현재는 누군가가 글씨를 깨버렸다.

일본군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병참 보급로 확보와 병참 조달을 위해 부비보병 제6연대와 제 10연대 및 후비 보병 제 18대대를 한반도에 주둔시킴으로써 본격적인 대륙 침략 단계로 들어선다.

부산 낙동 수안보 가흥 서울을 잇는 전선 가설이 8월에 이미 끝나 있었으며, 경부 통로에 21개의 병참부를 설치한다.

충주 지역에는 가흥 하담 충주 수안보 지역에 병참부를 두어 행군하는 일본군대의 사영지, 조선 인마의 고용, 식량 창고 설치 및 조선 돈의 매수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동학혁명군의 활동이 시작되자 진압에 투입된다.

9월 21일에는 가흥 병참부에서 조선인 인부를 모집 했으나 충청도 하담 가흥 지방의 동학교도가 일본 군대의 짐을 운반해 주는 놈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협박하여 충주 목사 민영기가 나서서 백성들을 효유하기에 이른다.

동학혁명군 세력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소식과 병참부 건설, 그리고 군용 전신선 건설로 일본 침략 야욕을 깨달아가면서 일본 병참부를 공격하고 전신선을 파괴한다.

이에 대응하여 일본군은 병참부에 병력을 증강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동학혁명군의활동은 계속된다.

일본군은 가흥에 압력을 넣고 있었던 동학혁명군이 북창나루에 주둔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 충주 병참사령부의 주정조장(酒井曺長)을 파견하였으며, 북창나루의 동학혁명군을 공격하여 본거지라 할 천등산 다릿재 진터의 동학혁명군 진지를 공격한다.

일본공사 정상형(井上馨)이 동학당 소탕을위해 본국의 대본영에 전보로 병력을 요청한 때가 9월 28(음력)일이다. 10원 21일에 후비 보병 독립 제 19대대가 출동하여 인천으로 들어와 전부터 들어와 있던 충주 가흥 주둔군과 합류하여 동학혁명군 섬멸작전 에 돌입한다.

10월14일, 이 지역 동학혁명군의 공격을 받아오던 충주 병참부의 일본군은 동학혁명군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단월에서 동학혁명군 수령 3명을 체포하였고, 15일 밤에는 청풍 부근의 동학혁명군을 공격하여 4명을 체포하고 30여명을 살해 한다.

이에 대응하여 성두한은 청풍 서창에 동학혁명군 세력을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가흥 병참부남쪽의 남소에도 동학혁명군이 총 집결하여 충주와 가흥 병참부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동학 혁명군은 먼저 전신선을 절단하여 충주 가흥ㆍ문경과의 연락을 두절시킨 다음 안보 병참부를 공격하여 소실시켰다.

▲최병터. 가흥에 주둔한 일본군들의 병영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흥 병참부에서 급히 요청한 증원군이 이천을 거쳐 27일에 도착하여 동학혁명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한편 전신선을 복구하였고, 가흥과 안보 병참부를 공격한 서창의 동학혁명군을 보복 공격한다.

이는 결국 동학지도부의 9월 재기포를 종용하는 결과를 낳았다.

9월 18일, 동학교단의 재 기포 선언에 따라 동학혁명군의 움직임이 활발해진다. 용수포에서는 허문숙 서장옥이 이끄는 강경파와 온건파에 속하는 신재련의 동학혁명군이 대치했다고 하나 이 문제는 명쾌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서장옥은 북접 동학혁명군 세력 중에서 강경파로 알려졌는데 전라도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등의 정신적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서장옥은 청주 사람으로,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인물이며 1900년에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진다.

용수포에 모인 북접 동학군은 노은 신의실을 거쳐 용원리로 이동해갔다. 여기서 경기도 동학군과 합진하고 북접 주력의 전략에 따라 진천 괴산 청주 보은 등지로 이동한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충주에 주둔한 일본군은 한층 다급해진다.

11월 2일 괴산 관아가 공격을 당하자 원전 소위가 이끄는 2개 분대 병력을 이끌고 괴산으로 출동하여 전투를 치러 일본군 1명이 즉사하고 3명이 부상을 입는다.(괴산 편 참조) 병참 사령부에서는 산촌충정 중대장으로 지휘관을 교체하고, 반삼 소좌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11월 10일 밤, 일본군은 충주에서 괴산으로 통하는 가도상의 남창과 월두동 부근에 동학혁명군이 있다는 급보를 받고 출동하여 12일 오리동에서 동학혁명군 10여명을 체포하여 6명을 타살한다.

14일에도 몇 명의 동학혁명군을 체포했으나 괴산 군수 박용석이 동학혁명군 2명을 괴산 장날 타살하도록 일본군에 요청하여 2명이 타살된다.

11월 중순에 이르자 일본군은 괴산 충주 청주 부근의 동학혁명군을 협공하기 위하여 작전을 세운다.

일본군은 신무기를 앞세워 무난하게 동학혁명군을 진압했지만 충청도 동북부 지역인 제천 영월로 들어간 제2중대는 산악에 의지한 동학혁명군의 저항에 밀려 고전하게 된다.

성두한 대두령이 이끄는 동학혁명군 세력이었고, 일본군은 혹한기에 접어들면서 지도자들이 체포되거나 잠적하면서 투쟁이 막을 내리게된다.

1894년 12월말 북실에서 패한 북접 동학혁명군은 충주 외서촌 되잔니에서 패한 뒤 뿔뿔이흩어지게 된다. 그래도 살아남은 동학혁명군의 삶은 여전히 고단했다.

`십가통규`라 하여 양반 사대부를 중심으로 감시를 받게되어 살길을 찾아 귀화 하거나 동학을 배반하고 동지를 팔거나 숨어 지내게 된다.

그러나 지방 민보군에게 가혹하게 도륙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신니면 원평리 내포에 사는 한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동학에 가담했던 수많은 동학혁명군이 가섭산 도둑골로 피했다가 민보군의 습격을 받아 비참하게 도륙의 당했다고 증언한다.

동학혁명이 막을 내리고 나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일본 침략에 저항하여 일어난 의병은 지각의 병인 셈이다.

당시 일본 기사에 충청도의 적(의병)은 동학당이 섞여 있고 군세가 성하여 충주를 함락하고 군수는 도망하였다는 보도로 보아 동학혁명군이 별수 없이 의병으로 전환한 사례도 있었지만 이 역시 규명해야 할 부분이다.



채길순 소설가 &amp;amp;amp;amp;middot;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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