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홍섭ㆍ충북농협지역본부 팀장

▲김홍섭ㆍ충북농협지역본부 팀장
'지난 4월24일 경남 하동군 화개장터 뒷산에서 진행된 6·25전쟁 학도병 전사자의 첫 유해 발굴 현장. 발굴감식단이 학도병 전사자들의 가매장지였던 흙더미를 2쯤 파헤치자 유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사자 유해 20여 구는 가로 2.5, 세로 6 구덩이 속에 포개져 있었으며, 어떤 유해는 새우처럼 웅크린 모습 그대로 발견돼 전사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한 유골 옆에서 나온 은제 회중시계는 찌그러진 채 57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투는 1950년 7월25일 오전 5~8시 벌어졌으며 시계는 학도병이 전사한 뒤에도 몇 시간 더 째깍거리며 가다 멈춘 것으로 보인다.

유골이 된 주인 곁을 57년간이나 지켰을 회중시계는 1950년 7월 25일 10시30분에 멈춰 있었다'

모 일간지에 게재된 학도병 유해 발굴 기사다.

기사를 읽어 가는 내내 가슴 한가운데로 구멍이 뚫린 듯 바람이 지나가는 느낌이다.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전투에 참전한 어린 학도병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공포 앞에서 얼마나 몸을 떨었을까?5월의 이파리 같은 영혼이 쓰러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려 본 것은 사랑하는 어머니 얼굴이었을까? 아니면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고향 언덕의 쪽빛 하늘이었을까?

어쩌면 이루지 못한 젊은 꿈이었거나, 성황당 느티나무 아래에서 수줍게 기다리던 첫사랑 여학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울꺽한 감상(感傷)이 밀려온다.

해마다 6월이 되면 각 기관단체에서는 보훈행사를 개최한다고 부산스럽지만, 후끈하던 관심과 열기도 중반이 넘어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모든 것을 희생한 선친들로 인하여 대부분 헐벗고 배우지 못한 채 불우한 삶을 살았을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회한, 청춘과 목숨을 바치고도 보훈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을 5,60년대 보훈가족들, 어릴 적에 가끔씩 동네에서 목격되던 상이군인들의 시비를 보면서 이해보다는 눈살을 찌푸렸던 무관심과 무지함의 기억들, 새삼스러운 상념들이 꼬리를 문다.

월남전이 종전 된지 30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월남전을 겪고 있는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의 외로운 투쟁도 가끔은 기사화되곤 한다.

고엽제 피해환자 전체 13만 3000여명중 국가유공자로 정식적인 대우를 받는 사람은 약 20% 수준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후유의증환자와 등급기준 미달자 등으로 분류되어 정부지원이 미약한 수준이란다.

미국은 월남전에 참전한 모든 사람들을 국가유공자 이상으로 최고의 대우를 해주고 있다고 한다.

위대한 미국의 기치를 내세우며 미군유해가 있는 곳이면 어떤 대가를 지불하든 유해를 발굴하고, 전 세계인들이 보란 듯이 엄숙한 예식을 거행한다.

성조기에 투영되는 비장한 얼굴들에서 위대한 미국은 결코 당신들을 버리지 않았노라고 부르짖는 듯한 그들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게 국가는 거기에 걸 맞는 예우와 대우를 해줘야 함은 당연하다.

금전적인 보상의 예우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국가유공자들이 명실상부한 예우를 받을 수 있는 사회분위기를 만들고, 특히 젊은 세대들의 애국심 함양에 활용될 수 있도록 진정한 호국과 보훈의 의미를 홍보하는 일이 연례적인 보훈행사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국의 위기와 부름 앞에 초개처럼 몸을 던졌던 호국의 기개를 기리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 스스로를 위한 일이라는 지당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상흔과 무심한 세월 속에 비록 몸과 마음은 야위어 가고, 당시의 이데올로기마저 점차 퇴색되어 갈지라도, 그들이 꿋꿋함을 잃지 않는 것은 그 때의 기개와 명예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으며, 또한 애국심이라는 가치를 믿기 때문이리라.

다음주 쯤에는 동작동 현충원을 찾아보며 보훈의 의미를 새로이 느껴보는 6월을 맞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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