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원 교수에 의하면, 신사임당은 글, 글씨, 학문, 예술 등에서 천재적인 소양을 발휘하였으며, 가정관리와 자녀교육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에 반해, 허난설헌은 신사임당 못지않게 재주가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바느질과 길쌈을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고통을 받다가 28세에 요절하였다. 전교수는 이러한 대조적인 삶이 오늘날의 여성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고 보았다.

신사임당과 같은 여성은 자신의 재능을 살려서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가정을 잘 돌보지만, 허난설헌과 같은 여성은 천부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주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자아분열감에 사로잡히고 끝내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 허난설헌이 많이 보인다.

대학원에 들어와서 열정적으로 공부하던 한 여학생이 얼마 전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필자를 만날 때마다 한숨을 쏟아놓는다. 아이는 그저 잠잘 때에만 예뻐 보이고 대부분 밉고 야속하며, 남편도 도와주려 애쓰지만 실제로는 도움이 안 되기에 원망스럽기만 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감당해야 할 긴급한 일들이 산더미 같으니 공부도 바깥일도 우선순위에서 밀린다고 한탄이었다. 열정 못지않게 재능이 많았던 학생인지라 지도교수 입장에서도 안타깝기는 매한가지였다.

얼마 전 오랜 만에 통화한 전업주부인 한 친구는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하는 남편도 아이들도 자신을 수시로 무시하는 통에 우울증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유로운 삶을 사는 것 같아서 늘 전업주부를 부러워했는데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자아실현에 대한 아쉬움이 결코 작지 않음을 깨달았다. 신사임당은 정말 어디에 있을까?

최초의 여성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맹렬 여성들이라면 예외 없이 슈퍼우먼 증후군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결혼하지 않은 경우가 상당수이고, 만약 결혼했다면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완벽하려고 노력하다가 심신이 지친다는 것이다.

사실 주변의 여성들 대부분이 슈퍼우먼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으며, 스스로의 삶을 백조로 표현한다. 늘 예측불허의 상황에 부딪히고 시간에 쫓겨서 동동거리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유안진 교수는 신사임당이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여성상이라고 했다. 실제로는 훌륭한 아내도 훌륭한 며느리도 아니었으며, 남편 이원수가 근무지를 옮기는데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 하는 대신 친정인 강릉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이 그 증거란다. 신사임당이 단지 자존심 높고 재능 있는 예술가였을 뿐 슈퍼우먼은 아니었다니 약간의 허망함까지 느껴진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고요한 가운데 능력을 발휘하는 신사임당의 모습이고픈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왔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여학생들에게는 슈퍼우먼보다 미국의 댄 킨들러 교수가 정의한 `알파걸(α-girl)` 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인다. 알파걸은 학업, 운동, 리더십 등 모든 방면에서 남자를 능가하는 엘리트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미국의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대표 연설을 하는 학생의 약 80%가 여학생이며, 학사 학위 취득자의 59%도 여학생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비슷한 사례가 보고 되고 있다.

신사임당을 잘 모를 뿐더러 신사임당을 알더라도 역할모델로 결코 택하지 않는 알파걸들이 많은 걸 보면 분명히 과거와는 달라진 것을 느낀다.

알파걸들이 결혼하고 자신의 꿈을 펼칠 때에도 지금과는 상황이 달라져 허난설헌의 삶을 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경화 한국교원대 교수ㆍ수학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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