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마당>송열섭 신부(청주교구 시노드 담당)

&amp;amp;amp;amp;quot;마음은 행위의 뿌리이고, 행위는 마음의 반영이다.&amp;amp;amp;amp;quot; 안양 나자로 마을에 있는 아론 피정의 집에 걸린 액자의 글귀이다. 마음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으나 우리의 행위는 바로 그 마음을 반영한다는 내용이다. 즉 행위가 바르지 못한 것은 그 마음이 바르지 못한 때문이고, 마음이 바르면 행위가 바르게 마련인 것이다. 성경에도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고 했으니, &amp;amp;amp;amp;quot;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기&amp;amp;amp;amp;quot; 때문이다.



얼마 전 인디언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amp;amp;amp;amp;quot;얘야, 할아버지 마음속에는 사자가 두 마리 있단다. 이 두 마리 사자는 늘 서로 싸우는데 한 마리는 선한 사자이고, 다른 한 마리는 악한 사자란다. 얘야, 너는 이 사자들을 어찌 하면 좋겠니?&amp;amp;amp;amp;quot; 손자가 눈을 깜빡이며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amp;amp;amp;amp;quot;할아버지, 그건 간단해요. 내가 키우고 싶은 사자는 먹이를 잘 주고, 키우고 싶지 않은 사자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 거예요.&amp;amp;amp;amp;quot;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과연 어떤 사자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가!' 솔직히 반성이 앞선다. 적잖이 후자에게 먹이를 제법 많이 주곤 했기 때문이다. 보통 영적인 선한 사자에게 보다는 육욕적인 사자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당장에 맛스럽다. 그래서 성경에 &amp;amp;amp;amp;quot;멸망에 이르는 길은 넓고 편해서 그리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많다.&amp;amp;amp;amp;quot;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 넓고 편하다는 길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데 그 문제가 있다. 육욕의 사자는 먹이를 주면 줄수록 더 달라고 떼를 쓰고 애를 먹인다.



죽은 물고기는 그저 물결에 떠내려간다. 살아있는 물고기만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결국 잘 산다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요 자기 수련이다. 그래서 인간답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에 있지 않고 그가 얼마나 인간다운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술, 마약, 도박, 물욕과 육욕, 나태와 이기주의 등 이러저런 것들에 얽매어 인생을 탕진하지 않으려면, 결국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행동을 바르게 하려 애써야 한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고 수행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삼인행이면 필유아사언(三人行必有我師焉)이라 했고, 만물교아(萬物敎我)라 했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갈 때 거기에 필히 나의 스승이 있다는 말이다. 스승은 먼데 있지 않고 가까이, 즉 내 가족이 바로 내 스승이며, 동료나 이웃이 바로 내 스승이다. 더 나아가 만물 즉 내가 접하는 산과 들, 나무와 풀, 그리고 새소리 와 물소리가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뜻이다. 이제 여름 휴가철을 맞아 가족들이 함께 산으로 들로 휴가를 떠나고 있다. 이 귀중한 시간에 한번쯤 가족이 둘러앉아 자신들은 두 마리 사자 중에 어떤 사자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보면 어떨까? 그리고 가족이 함께 가훈을 되새기거나 가정사명선언문을 작성하는 것도 보람이 있지 않을까? 가정이 바로 서야 사회와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으니만큼 자신과 가정이 어떤 사자를 키우고 있느냐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송열섭 신부(청주교구 시노드 담당)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