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선 칼럼] 2007년 5월 9일

지난 2002년 3월, 당시 민주당 대권후보군의 한명이던 김근태 고문이 '양심선언'을 했다. 2000년 8월 최고위원 경선 당시 2억4000여만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정치자금에 관한한 공개하지 않는 것을 금도(襟度)로 여기고 있는 정치 현실에서 대단한 '용기'였다. 많은 국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정작 정치권의 반응은 싸늘했다.

정치권은 대체로 '깨끗한 척 하며 경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술책'이라고 폄하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경선에 참여했던현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이인제,한화갑,김근태,유종근,정동영,김중권 씨 등도 모두 등을 돌렸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자명하다.액수의 많고 적음이 다를 뿐 검은 돈을 받지 않은 정치인이 과연 있을까. 제 발들이 저린 것이다.

이처럼 '양심선언'의 본질은 외면하고 '혼자만 깨끗한 척 한다'는 비난을 퍼붓는 현실이 바로 '현실정치'다. 김 고문은 결국 당내 반발에 낮은 지지율로 경선을 중도 포기했다. '양심선언'은 참혹한 실패로 끝났다.

김 고문은 뒤 에 "그때 너무 쓰라렸다"며 '다시는 그와 같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어두운 면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현실정치에서 살아남 기 어렵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때문일 것이다.

지난 1월 16일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로 꼽히던 고건 전 총리가 불출마를 선언했다. 범여권으로부터 출마 권유를 받아오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도 4월 30일 뜻을 접었다. 둘의 표면적인 불출마 이유는 '능력 부족'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보기에 그들은 성공한 행정 관료요, 훌륭한 경제전문가다. 무슨 능력이 모자란다는 것일까. 그들이 말한 '능력'의 함의(含意)는 무엇일까.

정치인의 일반적인 덕목과는 별개의, '다른 능력'을 에둘러 말한 것이리라. 바로 '현실정치에 몸을 담을 수 있는 능력' 이다.

그들은 현실정치라는 진흙탕 속에 뛰어들 능력, 그럴 자신이 없었다고 실토한 것이다. 정치경험이 없는 행정 관료와 학자출신인 그들의 눈에 현실정치는 너무나 혼탁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뛰어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 전 총장은 "평소 가졌던 원칙과 정치세력화 사이에서 제가 가진 원칙을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해 준비가 돼있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제자인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지식인으로서 몸가짐과 정치인으로서 몸가짐, 양자 사이에서 접점을 찾으려 했으나 어렵게 됐다"고 했다.

민주당 김종인 의원은 "세력화를 하려면 다른 세력과 접합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정체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고 전 총리도 마찬가지다. 그는 "대결적 정치구조 앞에서 저의 역량이 너무나 부족함을 통감한다"고 했다. 또 "앞뒤 말이 바뀌는 정치권의 본질 때문에 '정치의 장벽'이 의외로 높았음을 절절히 실감했다"고도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세력화를 이루고 또 정치자금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 둘은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공자는 일찍이 '정치는 바른 것이니, 스스로 바르게 행하면 누가 감히 바르게 행하지 않겠는가(政子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내가 아무리 바르게 행해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바르지 못한 세력'이 위세를 부린다. 안타깝지만 그게 우리네 '정치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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