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극동대 외래교수 문학박사 이상주

'화양구곡'은 한국 최고의 구곡이요, 한국 제일의 '문화산수'다. 그러나 '화양동'이라는 어원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있지 않다.

필자가 보기엔 다음 3가지 사연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화양동'은 본래 지금 '금사담' 근처를 가리킨다. 화양구곡이 설정되기 전인 '선유팔경'시대에 '파곶'과 더불어 2대 절승지였다.

첫째, 식물생태학적으로 '화양목(華陽木)' 많기 때문이 붙여진 이름이다. 보통 화양목(華陽木)이라 부르며, 학술적으로는 '황양목(黃楊木)'이 부른다. 최초의 기록은 성운(成運 1497~1579)의'칠송팔경(七松八景)', 제3경 '화양상춘(華陽賞春)'으로 여겨진다.

이황(李滉 1501~1570)의'선유동팔영(仙遊洞八詠)', 제3경 '황양상춘(黃楊賞春)'에 '황양(黃楊)'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춘영(李春英 1563~1606)의 시(詩) 서설에도 그런 내용을 덧붙였다. 송상기(宋相琦1657~1723)는 위와 같은 사실을 '남천록(南遷錄)'에 기록했다. 송주상(宋周相)이 1807년에 간행한'화양지(華陽誌)','지명연혁(地名沿革)'에서도 '화양동(華陽洞)'의 유래를 황양목이 많아서라도 기술했다.

둘째 중국 지명을 차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성운(成運)의'칠송팔경(七松八景)'제5경 '사평목우(沙坪牧牛) 사평에서 소 기르기'에 '도림(桃林)'에 관련된 고사가 나온다.

'서경(書經)','무성(武成)'에 보인다. 도림(桃林)은 무왕(武王)이 은(殷)을 정벌하고 나서 정벌할 때 동원했던 소와 말을 방목한 곳이다.

지금 하남성(河南省) 화음현(華陰縣) 동관(潼關)이다. '무력(武力)을 거두고 문교(文敎)를 다스릴 방침으로, 말을 '화산(華山)의 남쪽[(華山之陽)]'에 돌려보내고, 소를 도림(桃林)의 들녘에서 풀어놓아 이것을 두 번 다시 쓰지 않을 것을 천하에 보였다'라는 뜻이다.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를 유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화산지양(華山之陽)'의 준말이 '화양(華陽)'이다. '양(陽)'은 '산(山)'의 남쪽이라는 의미이니, '화양(華陽)'은 화산(華山)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지명중에는 중국의 지명을 차용한 경우가 상당 수 있다. 충북의 '청주(淸州)'·'상당산(上黨山)'등이 모두 그러하다. 지금의 화양동도 중국의 지명을 차용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셋째, 철학적 상징적 의미를 살펴본다. 이녕(李寧)은 '화피관(樺皮冠)'을 착용하고 생활했다.

이 사실은 성운(成運)의 '선유거사색시제황구이색기근(仙遊居士索詩題荒句以塞其勤)'4수중 제2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화피관(樺皮冠)'은 '화산지관(華山之冠)'이다. 즉 '화산(華山)의 모양을 본 떠 만든 관(冠)'은, 뜻이 높고 덕이 남다르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녕은 '선유동팔영(仙遊洞八詠)'을 정한 사람이다. 이렇듯 '화양'이라는 지명은 이녕(李寧)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화양동'이라는 지명에는 '화양목(華陽木)'이라는 특산물,'서경(書經)'에 나오는 중국의 지명과 고사, 화피관(樺皮冠 = 華皮冠)을 착용하고 고고하게 살았던 선유팔경의 설정자인 이녕(李寧)의 삶을 고무 찬양하는 뜻도 가미됐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상주 극동대 외래교수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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