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①

비록 체구는 왜소하고 말은 어눌했지만, 품은 뜻은 천도이고 잡은 붓은 사필이었으며 그 행동은 가히 천하대장부라 할 수 있었던 단재는 금강산 단풍 구경보다는 몽고삭풍에 흉금을 펼쳐 보이고 싶다. 는 기개로 오직 일제 타도와 조국해방을 위해 언론 문학 역사 대종교 무정부주의 의열단 등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투쟁하다가 피체된 후, 중국 뤼순감옥의 차디찬 감방에서 병고로 죽음의 위기를 앞에 두고서도 일제가 회유하기 위해 제시한 친일파 종친의 보호자 선정을 거부한 채 애국지사로서의 명예를 지키다가 끝내 순국하고만 한국독립운동사의 우뚝한 거목이다.

단재신채호선생사당전경.

특히 단재(사진)는 우리 역사의 흔적을 더듬고 그 위대함을 밝혀내 일제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는 국민들에게 민족혼을 고취시키고자 했던 칼날 같은 의지와 절개를 갖춘 민족사학자요, 민족적이고 근대지향적인 실학사상과 당시 서구의 주된 사상 조류였던 민족주의를 수용하여 정립한 낭가사상을 바탕으로 정통적인 민족사상의 기원·전승·기능을 규명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근대적 자주독립정신을 앙양하여 민족의 진로를 밝히고자 한 민족사상가이며,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지조와 신념을 지닌 채 서릿발 같은 필법과 시대정신으로 정론직필을 서슴지 않던 민족언론인이자, 조국독립을 위해 무장·폭력투쟁을 부르짖었을 뿐만 아니라, 직접 폭력투쟁 대열의 선두에 선 무정부주의자이자 폭력혁명가였기에 행동하는 지식인의 진정한 표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하여 단재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홍명희는 단재의 옥사 소식을 듣고 쓴 '곡 단재(哭 丹齋)'에서 "살아서 귀신이 되는 사람이 허다한데, 단재는 살아서도 사람이고 죽어서도 사람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면 지금부터 단재의 파란만장한 삶을 궤적을 더듬어보기로 하자.

채호는 1880년 12월 8일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고령 신씨(高靈 申氏) 가문의 부친 광식(光植)과 모친 밀양 박씨(密陽 朴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명문 사족에다가 조부 성우(星雨)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6품인 정언 벼슬을 지내기도 했으나 일찍 낙향하여 사숙을 세우고 인근 젊은이들을 모아 학문에 힘썼고, 부친 또한 문재가 뛰어났으나 조선 말기의 문란해진 과거에 실망해 관직에 나가지 않은 채 가난한 농촌의 한사로 지냈기에 채호는 태어나면서부터 외증조부 댁 외딴 묘막에 은거하면서 콩죽으로 연명해야 할 만큼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고달픈 시절을 보냈다.

설상가상으로 7세 때 부친이 돌아가시자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드미마을로 돌아와 조부 밑에서 글을 배운 채호는 책읽기를 좋아하고 한시를 잘 지어 인근에 살던 같은 또래의 집안 형제들인 신규식·신백우와 함께 '산동 삼재'로 불리기도 했는데, 청주 지역에서는 일기재(一奇才)로 단재·산동 삼재로 신규식·신백우·홍명희를 지칭(指稱)하고, 서울에서는 일기재로 단재·천하 삼재로 신백우·홍명희·담원 정인보( 園 鄭寅普:1892∼1950(?))를 치기도 했을 만큼 신동으로 촉망받았다고 한다.

열여섯 살에 풍양 조씨(豊壤 趙氏)와 결혼한 단재는 이듬해 신백우의 집에 기거하면서 그의 부친 구당 신병휴(苟堂 申秉休) 밑에서 공부를 계속하면서도 신규식의 고향에 세워져 있던 문동학교(文東學校)에 강사로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조부의 친구이자 당대 거물 대신이던 양원 신기선(陽園 申箕善:1851∼1909)을 소개받게 돼, 그의 배려로 충남 천원군 목천에 있던 그의 서재에서 많은 신·구 서적을 접하면서 학문의 지평을 넓히는 한편, 다시 그의 추천으로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게 된다.

성균관에 다니면서 독립협회에 가입한 단재는 중국의 변법자강론과 서구의 근대적인 시민사상을 함께 수용하면서 전통적인 유학사상에서 개혁사상으로 과감한 자기혁신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단재는 특히 량치차오(양계초(梁啓超:1873∼1928))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탐독하면서, 이를 통해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 in the Struggle for Life)'·아담 스미스(Adam Smith:1723∼1790)의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자유론(On Liberty)'등의 사상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단재는 3년 동안의 성균관 교육을 마친 22세에 성균관박사로 임명받았으나 뜻한 바가 있어, 이를 내던진 후 고향으로 내려와 신규식·신백우 등과 문동학교에서 민족정신과 교육계몽활동을 펼쳐 나가던 중,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1864∼1921)의 천거로 '황성신문(皇城新聞)'에서 논설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11월 20일자에 일제의 침략과 정부의 무능, 그리고 대신들의 매국행위를 질타한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실리자 일제는 이 신문을 폐간시켜 버린다. 이에 단재는 이듬해 박은식과 함께 영국인 어네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1872∼1909)이 경영하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로 옮겨가 중국으로 망명하는 1910년 봄까지 4년여 동안 주필로 근무하게 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친필.

또한 단재는 1907년에 '대한매일신보'의 총무이던 운강 양기탁(雲岡 梁起鐸:1871∼1938)과 함께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1878∼1938)·김구(金九:1876∼1949)·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1864∼1930) 등이 만든 비밀 결사대인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해 그 취지문을 작성하기도 한다. 단재가 취지문에서 밝힌 신민회의 활동 목표는 첫째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심어줄 것, 둘째 동지들을 찾아 민족운동의 힘을 기를 것, 셋째 교육기관을 세워 민족의 기둥이 될 젊은이들을 기를 것, 넷째 상공업 기관을 만들어 독립운동에 쓸 자금을 마련할 것 등이었다.

특히 일제가 한국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에서 거액의 차관을 들여오자, 외채를 갚지 않고는 나라의 주권을 지킬 수 없다는 자각이 민중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면서 신민회 주도로 전국적인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는데, 양기탁·윤응렬(尹應烈 : 형조판서를 역임한 인물로서 좌옹 윤치호(佐翁 尹致昊:1865∼1945)의 부친임) 등이'대한매일신보'에 본부를 설치하자, 일제 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와 국채보상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양기탁에게 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근거 없는 혐의를 둘러씌우고 1908년 8월 구속했지만, 그해 9월 최종 재판 끝에 무죄로 석방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국채보상운동은 중도에 막을 내리고 만다.

이 기간 동안 단재가 쓴 주요 시국논설로는 '일본의 3대 충노(忠奴)'·'금일 대한제국의 목적지'·'논충신(論忠臣)'·'한국자치제의 약사'·'가정교육의 전도'·'서호문답'·'정신상 국가'·'동화의 비판'·'이십세기 신국민' 등이 있으며, 사론(史論)으로는 '독사신론(讀史新論)', 영웅 전기류에는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동국거걸최통전' 등과 시론으로'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를 연재했으며 그 밖에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역술하고'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편찬하고 '가정잡지'발행에도 관여하였다.

그러다가 단재는 애국운동이 불가능해진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다.

박성일 저술가ㆍ문화해설가ㆍblog.naver.com/geochi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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