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혜 칼럼>충북대 교수

내가 막 청소년이 되어갈 무렵에 내 주변의 어르신들은 간혹 옛 추억을 더듬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우리 어릴 땐 수돗물도 그냥 마셨드랬어, 무심천 저기서 여름이면 날마다 멱 감고 고기 잡으며 놀았었는디, 뒷산의 칡뿌리 캐가며 질겅질겅 씹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던 일은 어쩌구, 한 여름에 마을 어귀 나무그늘에서 매미소리 줄창 들어가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그 때가 좋았지 암만 그 때가 좋았구 말구

아련해 보였다. 추억을 더듬는 눈빛도 아련해 보였고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그 시절이 안타까워 허공에 손짓을 하는 듯함이 그리움에 대한 상처로 스멀거려 보였다. 사실 나는 어르신들이 왜 그렇게 추억에 대한 그리움에 애착을 갖는지 그 때는 잘 몰랐다. 보이지 않는 기억이 행여 사라질까 조바심 내는 이유도 그 때는 잘 몰랐다.

며칠 전 우리 집 꼬마가 햄버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대한민국의 모든 햄버거 가게에서 파는 햄버거란 햄버거는 다 먹어보겠다던 녀석에겐 보통 힘겨운 다짐이 아닐 수 없다. 일종의 꿈을 져버리는 순간과도 같을 테니 말이다. 세상이 하도 민감하니 스스로도 조금은 불안했던 건 아닌가 싶다.

그러다 문득 예전의 그 어르신들이 추억을 향해 허공으로 눈빛을 날리듯 나는 미래의 어느 날을 향해 내 머리 끝 안테나 하나를 촉수처럼 올려보았다.

미래의 어느 날엔 나도 아마 그럴 것 같다. 내가 어릴 적엔 저기 지나가는 소들을 잡아서 먹곤 했단다. 저기 있는 돼지도 닭도 꽥꽥거리는 오리도 참 맛있게 먹었었단다. 너희들은 그 맛있는 불고기며 돈까스며 후라이드 치킨이 뭔지 잘 모를 거야. 그 때가 참 좋았지, 그 때가 참 좋았어...

어디 목축뿐일까 싱싱한 채소며 과일도 그림처럼 보면서 넋두리를 하지 않을까 싶어 벌써부터 아쉬워지기 시작한다. 비를 흠뻑 맞으며 낭만을 토로하는 건 꿈도 못 꿀테고 목이 마르면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시기보다는 갈증의 신경계를 마비시키는 작은 캡슐하나로 매일을 지탱해야 하며 배부르게 음식을 먹기보다는 포만감을 느끼는 알약 하나로 배를 채워야하는 시대가 눈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세상이 변하고 발전하는 이야기는 뒤로 미루더라도 사람의 욕심으로 세상을 바꾸지는 말아야 하지 않는가? 채식 동물에게 육식을 강요하여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는 일이나 원초적인 유전자를 변이하여 기형을 초래하는 일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이며 어떤 결과를 위한 일인가? 지금을 위한 일이 나중을 위해 얼마나 커다란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누군가들은 생각하고 있는지...

이젠 추억를 선물해 주자. 내가 내 아이들을 위한 보험보다 투기보다 조금만 미래를 배려하여 그들에게 추억을 선사했으면 한다. 어쩌면 나의 아이들도 MP3 보다 화상이되는 휴대전화기보다 지금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우러나오는 사골의 진국처럼 홀연히 다가온 어느 미래에 고마워하지 않을까? 내가 나의 손자 손녀의 손을 잡고 그들과 함께 후라이드치킨과 양념치킨을 여전히 뜯는 그런 할머니가 되길 간곡하게 바란다.

김미혜 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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