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웅 칼럼>소설가

최근에 필자는 본인의 작품을 뮤지컬로 올리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 소설의 장르를 떠나 공연 예술, 또는 공간예술의 카테고리 속에 진입을 하면서 상당히 많은 변화를 알게 되었다. 원작자로서 대본을 쓰고, 작사를 하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계속 울리는 음악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작곡을 공부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뮤지컬은 종합예술로서 저마다 전문가들이 각기의 전문성을 살려서 종합예술로 구현하는 장르이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음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느끼게 된 것이었다.

음악을 생각하면 그 무한한 감성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미술이든 문학이든 그 오묘한 깊이의 정체를 알기 어렵지만, 음악이 우리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할 것이다.

음악을 생각하면 필자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는 어느 기록에서 베토벤을 표현하기를 '킬러'라고 했다. 베토벤을 살인자라고 표현한 것은 현대적인 유행어로 표현하자면, 그의 음악이 죽여준다는 뜻일 것이다.

톨스토이는 베토벤에 심취한 나머지 그의 곡 중에 바이올린 소나타 9번(일명 크로이체로 소나타)을 제목으로 소설을 쓰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크로이체로 소나타'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만큼 그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해서 크로이체로라는 외교가에게 선물을 준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필자는 청년 시절에 톨스토이의 그 소설을 읽은 다음 베토벤의 크로이체로 소나타를 들어보았다.

톨스토이는 그 음악에 전율을 느꼈다고 했지만, 필자는 그의 감성만큼 그 음악의 깊이에 접근하지 못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고민했지만, 음악에 대한 감수성은 개인에 따라 다르며, 또한 의식의 수련 정도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라는 짐작을 한다.

뮤지컬을 준비하면서 유명하다는 뮤지컬을 거의 모두 보았다. 그런데 그 감동의 느낌이 각각인 원인이 스토리에서보다도 음악에서 연유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뮤지컬은 음악, 즉 작곡가의 손에서 승패가 갈린다는 결론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 오페라의 유령, 애비타, 켓츠 등을 작곡한 웨버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곡은 베토벤과는 다른 대중성을 가졌으나 수많은 사람들의 감성을 뒤흔드는 천재성을 지닌 듯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뮤지컬 공연의 붐이 조성되면서 검증받은 외국의 유명 뮤지컬을 한국어 버전으로 바꿔 공연하는 추세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노트르담 드 파리' '맘마미아' '켓츠' 등이다.

그런데, 한국어 버전 뮤지컬을 보면서 오리지널 공연과 감동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느꼈다. 그 원인은 군대로 말하면 신병 교육대에 입소한 장병에게 군복을 배급해서 입도록 하는데, 사람에게 옷을 맞춘다기보다 옷에 사람을 맞추는 식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우들의 음악성이 떨어져서, 고음을 요구하는 발성에 가서는 안간힘을 쓰지만 제대로 악성이 나오지 않아 소리를 꽥꽥 지르는 양상이다.

어쨌든 이 삭막한 현대의 세계에서 메말라 가는 감성을 정서 순화시키는 음악의 역할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죽여주는 음악의 세계는 미술이나 문학이 갖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생명을 우리게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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