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인순

'얘야 배 꺼진다 뛰지마라' 머리칼이 땀에 젖어 들어오는 나에게 어머니는 손목을 잡고 등때기를 내리치며 뛰지 말라고 당부 하셨다. 망아지 뛰듯이 들녘에서 뒹굴다 들어온 칠남매는 고봉으로 푼 밥사발을 순식간에 해치우고도 물 말아 남긴 할아버지 밥그릇까지 넘보며 늘 배고팠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끊임없는 욕구는 식욕이었다. 매슬로우가 얘기한 생리적인욕구, 먹고·입고 잘 곳만 있으면 인생은 더 없이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던 그 시절에는 배곯지 않는 인생을 사는 게 목표였다.

어찌하였거나 이제는 배고프지 않은 인생을 산다. 누구나 라고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이든 몸에 좋다는 것은 다 먹고 돌아다닌 결과 성인병이 찾아와 새벽 운동을 시작했다.

런닝머신 액정의 칼로리 소모량이 올라간다. 300칼로리, 쌀밥 한 그릇 먹은 만큼이 소모된 셈이다. 땀을 흘리며 스피드를 높인다. 그러다가 문득 어머님 생각이 났다. 배 꺼진다고 뛰지 말라던 목소리가 생생하다. 웃음이 나온다.

다시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면서 근육량이 많으면 칼로리 소모가 더 된다는 말에 물렁물렁한 지방을 근육으로 채우고자 또 땀을 흘린다.

늘 나를 유혹하는 맛있는 음식으로부터 자유롭자고 스스로에게 애원도 한다. 날씬한 복부·날씬한 팔뚝을 위한 스트레칭 그림을 보면서 원래의 내 몸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한다. 자식의 뱃구레가 꺼질까봐 뛰는 일 조차 삼가게 했던 어머니도 더 이상 비만하지 않기 위해 수영을 다니신다. 볼품없이 마른 자식들을 볼 때마다 더 먹이지 못해 늘 가슴아파하던 어머니가 대책 없이 허리가 늘어가는 둘째딸에게 다이어트를 권한다. 더 이상 잘 먹는 일이 우리에게 목표인 시대는 갔다.

추석물가가 걱정이라는 뉴스를 듣는다. 냉장고를 열어본다. 늘 허기졌던 어린 시절의 욕구로부터 그동안 냉장고는 가득 채워졌었다.

손이 크다는 말이 무슨 덕담인양 밥도 반찬도 정량이상으로 조리하고 수북이 남겼다. 한 상 잘 차려먹는 일로 어린 시절의 허기를 보상하려는 심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복부비만을 제거하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면서 우리 집 냉장고도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번 씩 대형 마트를 가는 대신 새벽 운동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슈퍼에서 그날 먹을거리를 사온다.

매일 슈퍼를 가다보니 굳이 식재료를 냉장고에 쌓아 놓을 일이 없어서 냉장고 안이 점점 더 환해진다. 아무리 물건을 싸게 산다 해도 냉장고에 보관하는 동안 내는 전기세를 보태면 그게 그거다. 부식비 지출이 반쯤으로 줄었다. 왜 신선한 재료를 한꺼번에 사다가 냉장고에 며칠씩 묵혀두고 먹었는지 모를 일이다.

슈퍼 냉장고 성능이 더 좋은데. 이번 추석에는 소풍가듯이 재래시장에 가서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구경도 하고 무겁다는 핑계로 한 두 가지 쯤 내려놓고 오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에서 카드로 구매 할 때보다 시장에서 현금으로 구매하게 되면 지출도 훨씬 줄일 수 있다. 현금 지출에는 지출의 심리적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못 먹었던 어린 시절의 무의식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것 같다. 그 대신 버려지는 음식을 확 줄여보자. 내가 버리고 남긴, 썩은 음식을 저승에 가서도 모두 먹어 치워야 깨끗한 새 음식을 먹을 수 있다던 어머니 말씀이 사실이라면 대략 난감한 일이다. 이번 추석 장바구니도 심하게 다이어트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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