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대논설위원

충청도 농촌지역 마을을 지나다 보면 마을 앞 또는 한 가운데 여지없이 엄청나게 큰 느티나무 한 두 그루씩 서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의 종자를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정자나무'라고 들 부른다. 초가집 한 두채는 덮어도 충분한 크나큰 정자나무는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 여겨진다. 그 뿐인가. 인근 마을과의 경계나 농경지 경계, 산마루턱에도 느티나무나 미루나무 등을 심어 정성스레 가꾸기도 했다. 이밖에 마을 앞뒤 허전한 곳에도 이 나무를 심어 주민들 마음을 달래주기도 했고, 마을변 하천 둑에도 심어 물놀이 하는 아이들을 지켜줬다. 작고 조촐하고 가난한 농촌마을 곳곳에 심겨진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오래 되고 모양새도 풍성해 봄 여름 가을 겨울 마을의 풍요로움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까지 꼽혔다.

우리 고향에도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한 그루는 수명을 다하고 20여년 전 없어졌고 한 그루는 수백년 고령을 뽐내며 지금까지 정자나무로 불리고 있다. 4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정자나무는 평생을 홀로 사신 박씨 할미가 심었으며, 누구든 나무를 상하게 하면 벌을 받고, 나무를 위하면(마음으로) 흥(興)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름만되면 모든 어른들은 저녁 식사를 한 후 이 나무 아래로 모여 담소를 나누는 '마을화합장'노릇을 톡톡히 했다.잎이 무성한 이 나무는 그늘이 마을 주민 전체를 덮어줄 만큼 넓고 짙었다.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이 나무 아래에 앉았으면 바람이 일고 땀이 싹 가셨다.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은 짚신을 삼거나 새끼를 꼬았고, 장기를 두거나 아이들은 공기 놀이를, 그리고 어떤 날은 대판 쌈움이 발생하기도 했다. 물론 화해의 장소도 이곳이었다. 이 정자나무 아래에서는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이 발생했다가 일정 시일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해결되는 해결장소이기도 했다.

비유가 좀 지나칠지 모르지만 이 정자나무는 마을의 '국회의사당'이었다. 60년대 우리 마을에 '김씨영감'이라 불리는 어른이 사셨다. 옛날 어른 치고는 제법 키와 몸집이 크셨고 성격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시는 올곧은 어른이셨다. 정자나무 밑에서 자장가처럼 들려오는 매미소리와 함께 달콤한 낮잠들을 자지만 이 어른은 늘 가장자리 한장소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책을 읽으신다.

사자소학(四字小學)을 시작으로 천자문(天字文), 명심보감(明心寶鑑), 논어(論語),맹자(孟子)…. 언문인 용담유사까지 한나절…. 어느땐 종일 책 읽기는 이어진다. 대부분 주민들이 그 어르신 독경을 마치 잔잔한 음악소리로 여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얘기하고 잠자고 놀이하고 했었다. 대부분 농촌마다 공동체가 자취를 감추고 사람들도 하나둘 농촌마을을 떠나갔다. 자식의 교육, 벌어먹기 위해서 등등의 이유로 마을을 떠날 때 남아있는 마을주민 몇 명은 이 정자나무 아래까지 모두 나와 떠나는 사람들을 눈물로 배웅을 했다.

마을 정자나무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고, 낮잠자는 어른들 코고는 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나는 끝까지 보며 50대 중반이 됐다. 물론 지난 4월 94세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간접적으로 모시느라 반은 시골집에서 산 덕이다. 지난달 말 휴가를 얻어 오랜만에 이 정자나무 그늘아래 몸을 뉘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정자나무 밑둥이에 작은 느티나무 싹들이 파릇파릇 움이 트고 있었다. 사람 손발이 닿지 않았다는 징표였다. 가슴이 찡 했다. 얼마전 그 작은 나무 싹들을 모두 뽑아다 텃밭 귀퉁이에 정성스레 심었더니 제법 잘 자란다.

남녀노소 온 동네사람들이 모여 북적이던 정자나무 밑이 텅텅 비었고 때늦은 여름을 재촉하듯 매미들만 모여들어 귀가 따갑게 울고 있는 요즘이다. 정자나무 국회의사당은 이제 개점휴업….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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