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연휴를 이용해 충남 예산군 광시면에 다녀왔습니다. 예당저수지 끝자락에 자리 잡은 한국문인인장(印章)박물관으로 마실 다녀 온 것입니다.

이 곳은 제가 가슴 따뜻한 사람들의 얘기를 글로 쓰고 싶어 했던 중학교 시절, 소년에게 한없는 사랑과 지도를 아끼지 않으셨던 소설가 이재인 선생께서 40여년간 수집한 문인들의 도장 600여개를 전시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도장만으로도 박물관을 만들 수 있느냐고요? 물론입니다.

이 땅에는 희귀한 박물관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열쇠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쇳대박물관, 한국영화사를 엿볼 수 있는 영화박물관, 옹기만으로 특화시킨 옹기박물관, 한국의 전통술을 모아 놓은 술박물관, 김치의 맛스러움과 신비를 소개하고 있는 김치박물관, 신문박물관, 문신미술관, 등잔박물관, 화폐박물관 등 이름만 들어도 오감이 짜릿하고 궁금해서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테마박물관이 산재해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멋과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대형박물관은 사람에 치이고 규모에 기가 죽고 시간에 쫓겨야 하지만 테마박물관은 인간의 온기와 역사의 혼맥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정감 넘치는 삶의 여정을 체휼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박물관에 도착하자마자 선생께서는 텃밭에서 풀 뽑던 호미를 내팽긴 채 뛰어오셨습니다.

어떻게 살았느냐, 그동안 소식도 없이 무심한 세월을 보낼 수 있었느냐, 시골의 어른들은 잘 계시느냐…. 당신께서는 한참을 이렇게 묻고 또 물으셨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죄송하고 부끄럽고 감사했기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당신께서 직접 커피를 타 주시고 수박을 썰어 내셨습니다. 어린 딸들은 널찍하고 낮선 방이 신비롭다는 듯이 여기 저기 뛰어다니기 시작합니다.

서재와 거실, 전시장과 마당, 심지어는 화장실까지 들락날락 정신 사납게 합니다. 도장에는 도통 관심을 두지 않고 까불까불 거립니다.

장인들은 도장을 만들지 않습니다. 도장을 사용할 사람의 마음을 나무에 새길 뿐입니다. 그리하여우리들은 내 마음속에 있는 소중하고 따뜻한 사랑을 도장에 담아 하나둘 전달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월이 농익으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녹음과 거친 삭풍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도장도 사람을 닮아갑니다.

진솔한 삶을 노래하게 됩니다. 인장박물관에는 박목월 김동리 서정주 등 주옥같은 시를 선사했던 원로시인에서부터 조정래 조병화 전상국 이어령 등 현대 한국문학사에 크고 작은 업적을 남긴 분들의 도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니, 한국문학을 이끌어 온 문인들의 열정과 삶의 흔적들을 도장이라는 작은 아이콘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게다가 몇몇 문인들의 유품과 저마다 개성미 넘치는 시비가 정원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인장박물관이라기 보다는 문학관이자 시비공원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이렇게 한 곳에 도장을 모아두지 않았다면, 선생께서 그동안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지 않았다면 뒷간 마당가에 방치되어 썩어가거나 쓰레기 매립장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 것입니다.

버려지고 잊혀진 자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다행히도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 때문에 저 많은 도장이 새 삶을 찾게 되었습니다.

가슴 저린 사랑을 간직한 문인들을 애틋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도장에게 존재의 의미이자 가치가 무엇이겠습니까.

문인들이 자신의 주옥같은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발행한 뒤 그 책 뒤에 낙관처럼 사용하거나, 책머리에 저자의 친필과 함께 붉은색 이름 석 자를 남기는 것, 그리고 책의 주인과 함께 영원히 그곳에서 생명의 숨소리를 들으며 함께하는 것이겠지요.

이제는 예쁘고 정갈한 모습으로 주말마다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박물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그들의 뜨거운 가슴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께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박물관 뒷산에서 숨죽이고 있던 바람이 고운 향기를 내 몸 안에 가득 내뿜은 뒤 조금씩 숨을 토합니다.

내 가슴이 맑고 향기로운 기운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하늘과 들녘이 온통 연둣빛 물감으로 가득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 가족은 박물관 나들이를 통해 잔잔한 기쁨과 감사를 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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