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웅 소설가

우리가 말하는 꿈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잠을 자면서 꾸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것은 엄밀하게 동일한 개념일 수도 있다.

꿈을 심리학적으로 연구한 프로이드의 견해에 의하면 잠자면서 꾸는 꿈은 평소에 소원하는 바를 꿈에서 대리로 충족시키는 수단이라고 했다.

소원충족에 대한 꿈의 정의는 지금도 많은 심리학자들이 신봉하고 있지만, 그것이 옳다고 정의내리기에는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프로이드 자신도 인정했듯이 가끔 불가사의한 미래에 대한 예시가 있을 때는 소원충족이라는 정의만으로 해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꿈이 인간의 미래를 암시한다는 것은 과거 성경에서도 나오고, 오랜 역사의 기록에서 언급되고 있다. 자칫 미신에 빠지기 쉬운 꿈의 예시 문제는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풀어야 하는 숙제로 남아 있다. 꿈이 인간의 미래를 예시한다면, 인간에게는 미래가 정해져 있는 운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운명을 논하는 자리에서 항용 인용되는 산사태 이야기가 있다. 어느 사람이 점을 보았더니 곧 횡사할 운명이니 조심하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 말을 들은 이후 그는 아예 두문불출하면서 집안에서만 지냈다. 그렇게 은거하고 있는 어느날 장마가 져서 뒷산에서 산사태가 나며 집을 덮쳤다. 집안에 있던 그는 흙더미에 깔려 죽었던 것이다.

죽을 운명이라면 어떻게든 피할 수 없다는 말도 되지만, 만약 그가 점을 보지 않고 있었다고 해도 죽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되어도 산사태로 죽었을까, 아니면 돌아다니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을까.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우주가 인력에 의해 움직이듯지, 만물은 어떤 섭리에 의해 움직이고, 모든 생명, 하다못해 무생물조차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죽은 다음에 영혼이 있느냐는 문제라든지, 종교문제까지 소급해 올라가서 아주 복잡해지기에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말기로 하고, 다만, 우리가 잠자면서 꾸는 꿈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누구나 다 꿈을 꾼다고 한다. 다만, 그것을 많이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곧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어느 사람은 평생 꿈을 꿔본 일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평생 꿈을 꾸지 못한다는 것은 생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꿈에 대한 기억이 없었을 뿐이다.

꿈은 인간의 잠재의식이 활동하는 것인데, 프로이드의 생각처럼 인간의 잠재의식이 평소에 소망하는 것을 꿈에서 만족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점술가들이 주장하는 미래를 암시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잠재의식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미래를 다녀오는지도 모를 일이다. 때로는 왜곡되고, 때로는 사실적이며 투시적으로 미래를 암시하는 경험을 할 때도 있다.

우리는 모두 꿈을 꾼다. 잠자면서 꾸는 꿈이든, 미래에 대한 소망이든, 꿈을 가지고 생활한다고 봐야 한다. 그 꿈은 우리에게 활력소를 줄 수 있으며, 희망을 주며, 역동하는 생명력을 줄 수 있다. 꿈보다 해몽이 중요하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자살하는 사람은 바로 그 꿈을 잃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꿈을 가지고 미래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