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쇠고기 수입허가를 둘러싼 국민들의 반발이 표출된 촛불시위가 수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지극히 평화롭고 자연스럽게 시작된 시위가 일부에서는 폭력시위로 변질되어 경찰과 티격태격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급기야는 대통령을 비롯한 관련 장관들이 불법시위 엄단을 강조하고 나섰다.

모든 국민들이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 문제를 정부와 함께 해결해야 할 야당들은 확고한 신념이나 대안도 없이 국회를 팽개쳐놓은 채 국민들이 벌여놓은 '촛불의 장(場)'에 슬그머니 무임승차 하여 즐기고 있다. 시간이 가면서 외부세력의 개입도 늘어나 순수성을 의심받게 하고 있다.

이번 촛불집회 과정을 지켜보면 1930년대초 인도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 진행되었던 소금 사티야그라하(眞理把持) 운동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국에 대한 불복종운동으로 영국제 옷 태우기, 물레로 직접 옷 지어입기 등 다양한 투쟁을 전개해오던 간디는 1930년 들어서면서 뿌라나 스와라지(완전자치)를 선언하면서 그 투쟁도구로 국민들의 생필품인 '소금'을 선택했다.

당시 영국은 인도에서 소금법을 제정하여 식민정부가 전매케 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한편, 인도인들은 생필품인 소금을 비싸게 사 먹어야 했다.

따라서 소금세를 폐지하고 인도인들이 인도의 바다에서 직접 소금을 만들어 먹자는 간디의 외침은 인도 국민들의 마음을 깊숙히 움직일 수 있었다.

1930년 3월 12일 간디는 소금세 폐지를 위한 국민적 관심을 모으기 위해 80여명의 청년들과 함께 서부 해안의 뭄바이 인근 단디 해안을 향하여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거리는 총 400여km이고 중간에 170여개의 마을을 지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간디는 중간중간 마을에 도달할 때마다 행진의 필요성과 목표, 인도 국민이 해야할 일 등에 대하여 연설했다.

25일간의 행진을 마치고 4월 6일 단디 해안에 도착했을 때는 행진 인원이 2천여명으로 불었으며 인근 주민까지 수만명이 모여 있었다.

간디는 바다에 쌓인 소금에서 한 줌의 소금을 퍼올리며 전체 인도 국민이 소금을 자유롭게 만들고 판매하여 소금법을 위반해나갈 것을 주창했다.

이 광경은 인도 국내의 신문들에 보도되었을 분 아니라 외신기자들에 의하여 전세계적으로 보도 되었다.

이후 인도 각지에서 소금법 위반이 자행되었다. 경찰은 닥치는 대로 범법자들을 체포했고 마침내 간디도 5월6일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여파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가운데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같이 간디의 소금행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비폭력' 이었다.

간디는 전체의 운동 과정에서 시위자들이 경찰의 폭력에 맞서 같은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을 절대 금지시켰고 그같은 행위가 발생했을 때는 가차없이 운동의 중단을 선언하곤 했다.
경찰의 곤봉을 맞고 그대로 피흘리며 쓰러지는 군중들의 모습은 패자의 모습이 아니라 승자의 모습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촛불시위를 바라보면서 간디의 소금행진을 떠올리는것은 여기저기서 폭력화의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시위의 진정한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시위는 시위 그 자체로 끝나야 한다.

이제 두달 이상의 시위에서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다고 본다. 국가가 국민의 주장을 받아들여 현실적인 입장에서 최대한 수용하고 반영하는 노력을 보이는 시점에서 더 이상의 촛불시위는 무의미 하다.

자칫 그 순수성이 다른 정치적 의도를 가진 무리들에 의해 이용당하고 훼손되어 본질이 오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과 반년전 우리의 손으로 뽑은 정부, 출범 4개월을 맞은 정부가, 국민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두 번의 대통령 사과를 통하여 절절히 깨달은 정부가 이제는 일할 수 있도록 국민이 나서서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경제적 난제들이 산더미같은 현시점에서 우리에게 더 이상 촛불시위로 허비할 시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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