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의상변리사

공장이 시골 쪽에 있는 곳으로 출장을 가다보면 요즘도 담배밭이 많이 보인다.

지나가는 길이지만 ‘저 밭의 담배잎은 딸 때가 된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려 본다.

요즈음은 상대적으로 편해졌지만, 담배농사, 제일 힘들고 1년을 꼬박 일해야 했던 기억이 새롭다.

필자의 시골에서도 담배 농사를 많이 했었다. 어쩌면 지겹도록, 필자도 대학 때는 방학 중이거나 수업이 없을 때는 품앗이를 해가면서 담배 농사일을 거들었으니 담배 농사라면 이골이 나도록 해 보았다.

오죽하면 필자가 대학 졸업 때 당시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당숙모께서 필자가 가짜 대학생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토로하셨을까.

볼 때 마다 지게를 지고 있거나, 리어카를 끌고 있거나, 소달구지를 몰고 있거나 후에는 경운기를 운전하고 다니는 것을 보았지 책가방 들고 학교 가는 것은 어쩌다 한번 보았을 뿐이니 조카인 필자가 대학을 다닌다고는 하나 분명 가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기억으로는 정월보름 쯤 일을 시작한 것 같다.

담배모를 키울 비닐하우스를 짓기 위해 언 땅에 비닐하우스 대를 세울 말뚝을 억지로 박는 것으로 시작한 것으로 기억이 된다.

하우스에서 키운 담배모를 담배 밭에 이식하기 전 지게, 리어카, 소달구지나 경운기로 거름을 내고 밭을 갈아 담배 심을 준비를 했다.

담배 밭에 담배모를 이식할 때는 봄바람이 많이 부는 때였다. 평지밭은 괜찮았지만 비탈진 밭은 만만치 않았다. 먼저 막대기 (나중에는 흙 파는 장치로)담배모를 이식할 구멍을 적당한 간격으로 파고, 담배모를 놓고 물을 부은 후 이식하였다.

어린 우리들은 담배 구멍을 파는 일, 담배모를 놓는 일이나 물 붓는 일 등을 하였었다. 좀 더 커서는 밭 저만치 아래의 논에 있는 둠벙에서 물지게로 물을 길어오는 일을 하곤 하였다. 바람이 세어지기 전, 어떤 때는 바람과 싸우며 비닐을 덮고 마무리를 하면 담배심기는 끝났다.

담배가 비닐에 닿을 만치 크면 담배포기마다 칼 또는 적당한 도구로 비닐을 찢었고 그 포기마다 흙을 채워 넣는 일을 해야만 했다. 구부려 해도, 앉아서 이동하며 해도 흙 넣는 일은 정말로 힘들고 지루했다.

담배가 커서 꽃이 피려하면 순을 잘라내고 순을 잘라내면 잎마다 또 순이 나오므로 이를 또 잘라내야만 했고 진딧물이나 담배벌레(담배 색과 똑같다)약을 몇 차례 뿌렸다.적당히 담배 잎이 익으면 맨 아래부터 따기 시작하여 약 일주일 전후로 약 한달여간 담배 잎을 딴 기억이 난다.

딴 담배 잎은 새끼줄 나일론으로 된 새끼줄도 있었다. 마디마다 1~3잎 씩 엮어야만 했고 다 엮은 줄은 2층 높이의 건조실에 빼곡히 맨 후 건조실문을 황토로 봉하고 석탄과 흙을 개서 담뱃불을 땠다. 어쩌다 건조실 내부의 줄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작은 문으로 약 80℃정도의 내부로 들어가 꺼내든지 다시 매곤했다.

이렇게 담배를 한참 건조할 때는 한여름이었다. 다 건조 된 담배 잎은 조리를 했다. 많은 아주머니들이 색깔별로, 크기별로 선별하여 한 묶음씩 묶고 이것을 또 다시 크기별, 색깔별로 한 포대씩 묶었다. 습기가 들어가면 색이 변한다고 각별히 신경 써 보관한 것은 가을이 되어서다.

초겨울이나 겨울에 소위 담배를 쳤다. 제일 좋은 것 위에 떡을 해 넣었다. 잘 봐 달라고.그렇게 담배를 바치던 날 동네 모든 이들이 불고기집으로 향하고 거나해진 얼굴들로 동네로 들어오면 1년 담배 농사는 끝나는 것이었다.

너무도 힘들었던 이들이, 이제는 그만하겠다고 큰소리치지만 철이 되면 또 말뚝을 박고 비닐하우스 준비를 했던 것이 담배농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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